[아침숲길] 윤동주는 얼마나 오래 별을 바라봤을까
“7월 29일까지 원고를 부탁드립니다.” 소식을 들으면 머릿속에 작은 기계장치 같은 것이 생겨난다. 일상에 지장 없을 정도의 저전력으로 이 장치는 구동되기 시작한다. 장치가 하는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에 성급해지면 어설픈 답에 사로잡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이 기계장치는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주변 환경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감응이다.
감응은 건물과 나무로 시작해 바람과 질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내 오감을 자극하며 머릿속으로 진입하는 각종 도시의 정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직접적인 응답은 하지 않으려 한다. AI처럼 데이터 속 타인의 감응을 학습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장마철 빗방울의 소리보다 먼저 들어온 비 냄새에 뇌신경 하나 반짝 불이 켜지듯, 느리지만 스스로 ‘그륵 그륵’ 성능 나쁜 컴퓨터처럼 느끼고 반응하는 일이다. 자극이 너무 많은 이 도시에서는 저전력으로 움직이는 이 장치가 어쩌면 적합한지도 모른다.
시는 참 쉬워 보인다. 시가 쉬워 보이는 것은 짧은 일상의 단어로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얼마 전 타계한 김민기의 노랫말을 그려보면, 단어들은 새벽 한순간 이슬처럼 노랫말에 맺혔더라도, 오랜 시간, 말 그대로 긴 밤을 지새우며 되새기고 되새긴 마음의 결정체임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시와 연구는 닮아있다. 시는 사랑과 삶을 짧은 글 속에 담아내고, 연구는 우주를 짧은 수식 속에 담아낸다. 좋은 시어는 아침이슬이 풀잎에 맺히듯, 허공에 보이지 않던 물방울이 ‘반짝’ 맺히는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사과나무 밑에서, ‘유레카’가 욕조 속에서 반짝 솟아났다고들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2)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시의 일대기를 그렸다. 실비아 나사르의 동명 소설에서는 존 내시가 일한 미국 방산기업 더글러스 항공의 싱크탱크 랜드의 풍경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다. 공식적인 세미나와 회의가 없는 랜드는, ‘우연한 만남을 극대화하기 위해’ 안뜰을 중심으로 한 격자구조 공간으로 설계됐는데, 연구자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와 새로운 연구 결과는 우연한 만남에서 공유됐다. 그 공간은 수학자들의 만남 횟수를 수식으로 만든 수학자에 의해 설계됐다. 존 내시는 종종 이빨에 종이컵을 물고는 공간을 서성거리고 배회하다가 가끔 얄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많은 생각의 싹은 샤워를 하거나, 운전을 하거나, 버스 차창으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볼 때 불쑥 솟아나곤 한다. 그래서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아도, 절대 성급히 컴퓨터 앞에 앉지 않고 그런 공간과 시간을 찾으려 애쓴다. 까탈스러운 머릿속 장치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오래된 나무의 잎들이 재잘거리고, 노천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료들과 우연한 만남이 있다면 더 좋겠다. 하지만 그런 공간과 그런 시간이 사라지고 있다. 숫자나 금액으로 증명돼야만 공간도 시간도 살아남기 때문이다.
시도 연구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바람 좋은 날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대어 멍하니 진동에 몸을 맡기는 듯해도, 머릿속에는 작은 장치가 마침내 신호 하나를 받아들이고 이윽고 폭풍과 같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그런 시간, 그런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 시간은 찰나와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오랜 기간 머릿속 장치가 저전력으로 환경과 감응한 결과이다.
AI의 유행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오래 봐야 가능하다고 했던 일이 무의미해지고 있는 시대다. 암울했던 시대 한가운데서, 또는 사랑을 하고 고뇌를 하면서 되새기고 되새겨 단어 하나에 마음을 담는 시조차도 AI가 쓸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다. 과연 그럴까. 김민기 선생의 죽음을 접하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윤동주는 얼마나 오래 별을 바라봤을까. 김민기는 얼마나 많은 새벽을 맞이했을까.
무용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머릿속 작은 장치는 ‘그륵 그륵’ 별과 새벽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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