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 다르고 속 다른 미술을 경계하다…‘그림자 작가’의 선연한 갈망

노형석 기자 2024. 7. 3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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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만든 근작인 ‘거미라 합시다’. 돌가루를 바른 화폭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철사나 노끈 같은 선을 꼬고 뭉쳐 빚어낸 듯한 거미의 형상을 그려넣었다. 노형석 기자

21세기 현대미술판은 뻔뻔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모순적이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 같은 대형 현대미술제나 주요 뮤지엄의 전시를 보면 양극화와 민족 갈등, 전쟁, 기아, 난민, 기후 이상, 인종차별, 소수자 등 지금 세계를 옥죄는 문제적 상황에 대해 많은 작가나 기획자는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전시와 작품으로 발언한다.

하지만, 그들의 상당수는 시장의 논리 속에서 이해득실에 따라 계산적으로 작업하고 발언하는 행태를 보인다. 앞에선 진보적이고 전위적인 메시지를 내놓다가도 뒤에서 미술자본, 화랑주, 딜러, 컬렉터와 작품 판매와 흥행을 놓고 밀실 흥정을 벌이는 모습은 시장이 지배하는 국제미술판에서 낯선 모습이 아니며 지금 한국 미술판도 예외는 아니다.

2021년 만든 작품들인 ‘틀에 갇힌 무용수Ⅱ’(왼쪽)와 ‘끼워넣기’. ‘틀에 갇힌…’은 빈 화폭 위에 무용수의 율동을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아크릴 물감의 선으로 휙 그어 풀어냈다. 노형석 기자

한국 화단에서 ‘자유인’으로 잘 알려진 화가 곽남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명예교수가 최근 잇따라 내놓은 두 건의 전시회는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른 현대미술의 속성에 대한 작가 나름의 경계심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드러낸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 밈의 개인전 ‘누구세요’(8월11일까지)와 방이동 갤러리 더스페이스 138(10월31일까지)에서 열리고 있는 또 다른 회고적 개인전 ‘덫에 걸린 그림자’가 바로 그 무대들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1970년대부터 회화, 판화, 드로잉, 조각, 네온작업,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이단아처럼 끊임없는 실험을 거듭해온 곽 작가는 40년 넘게 그림자의 형상을 핵심적인 이미지로 다뤄 ‘그림자 작가’, ‘그림자 회화’로 알려졌다. 존재의 흔적인 그림자를 전면에 끄집어냄으로써 실체에 대한 상상력을 촉발하여 환영의 세계로 이끄는 군상, 인물 작업이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이런 그림자 회화에서 더 심화한 미학적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선과 윤곽을 해학적으로 휘둘러 구성하면서 인간 혹은 동물 같은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특유의 작업 흐름을 최근 더욱 단순하고 강렬하게 증폭시킨 근작들을 내놓았다.

우선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은 갤러리 밈의 5, 6층 사이 공간에 걸친 큰 스크린에 동영상으로 상영되고, 5층 전시벽 한편에 조그맣게 걸린 2023년 근작 ‘거미라 합시다’다. 돌가루를 바른 화폭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철사나 노끈 같은 선을 꼬고 뭉쳐 빚어낸 듯한 거미의 형상을 그려 넣은 것인데, 동영상에서는 증폭된 모양새로 스크린 위를 기어 다니는 모습이다.

1972년 청년 시절 유채로 그린 작가의 자화상. 노형석 기자

그냥 보기엔 헐렁한 선의 뭉침 같은 것이지만 낯선 눈으로 보면 여러 형상의 상상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이 들어간 작품이다. 한 사람 혹은 군중의 어떤 움직임을 그리다 만 듯한 선으로 포착하고 기발한 제목을 단 ‘깜짝이야’ ‘시간이 머무는 곳’ ‘욕심쟁이’ 같은 다른 작품에서 보이는 눈속임 같은 해학적 선에서도 이런 믿음은 감지된다.

더스페이스 138에서 보인 작품에서는 1970년대의 자화상과 오브제 작품과 더불어 시들어 껍질이 벗겨진 꽃봉오리들의 주검 같은 모습을 찍어 캔버스에 입힌 작품(2018년작 ‘진짜 - 가짜’) 등도 등장하는데, 17세기 바로크시대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회화처럼 죽음이 항상 우리 삶에 상존하고 있다는 허망감을 독특한 구도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2018년 작 ‘진짜 - 가짜’. 시들어 껍질이 벗겨진 꽃봉오리들의 주검 같은 모습들을 찍은 사진프린트를 캔버스에 입힌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거대 서사 혹은 이상주의를 싫어하고 요란하게 덩치 키우는 현대미술의 탐식증과 과시증을 경계하는 작가 특유의 성향이 헐렁하고 허접한 듯한 선과 면의 대비로 드러나는 이 전시는 볼수록 곱씹어보는 재미가 있다.

‘예술이 더 작고 겸손하며 피부에 와 닿는 재미, 진실한 아름다움을 지니는 활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라고 김원방 평론가가 통찰한 것처럼 작가가 보여주는 헐렁한 선면의 이미지는 이 시대 미술의 진정성을 좇는 절실한 갈망을 느끼게 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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