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중국인들은 왜 ‘5·18 광주’를 이야기할까
도쿄에서 중국의 미래를 고민하는 많은 이들은 단기간에 현실을 바꿀 쉬운 해법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함께 변화의 싹을 키워나가고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의 더 많은 이들이 마음의 벽을 허물고 힘을 보태기를 바라고 있었다.
몇 달 전, 일본에서 만난 한 중국 유학생의 말이 마음속을 계속 맴돌았다. 그는 많은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 언론인들이 일본에 머물고 있다며, “지금이 마치 청 말 같다”고 했다. 100여년 전 위기에 빠진 청 제국을 변화시키려던 개혁가, 혁명가들이 일본으로 향했다. 량치차오(양계초), 쑨원, 루쉰을 비롯해 많은 중국인이 일본에서 조국의 미래를 고민했다. 신해혁명으로 청 제국을 무너뜨린 중국동맹회가 1905년 결성된 곳도 지금의 도쿄 오쿠라호텔 자리다.
2022년 봄, 혹독한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상하이가 봉쇄되자 중국인들이 ‘룬’(潤)을 시작했다. 영어로 ‘도망치다’(run)와 발음이 비슷한 ‘룬’은 해외로 탈출한다는 뜻의 유행어가 되었다. 그중 가장 많은 이들이 일본으로 향했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친후이 전 칭화대 교수, 양쿠이쑹 화둥사범대 교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고 류샤오보의 부인인 시인 류샤 등이 일본에 머물고 있다. 지난 6월4일 천안문(톈안먼) 시위 무력 진압 35주기에는 일본 국회의사당 안에서 중국인, 일본인들이 함께 추모 행사를 열었다. 매년 홍콩에서 열리던 추모 행사가 열리지 못하게 된 지금, 도쿄의 천안문 추모 행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지난 19일 도쿄 와세다대학 근처, 중국인들이 매주 모여 강연과 토론을 하는 작은 공간을 찾았다. 2022년 일본으로 이주한 인권변호사 우레이가 지난해 12월 문을 연 곳이다. 우레이는 “많은 중국인이 현실에 낙담하고 있다. 중산층은 파산했고 다들 막막해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토론의 핵심 주제”라고 말했다. 그는 이곳의 강좌와 토론회에 참여하는 도쿄의 중국인들이 일종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심리상담,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 활동도 한다고 했다.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제로 코로나 봉쇄 등으로 갑자기 사업이나 가게가 망하고, 불시에 찾아오는 공안의 괴롭힘을 겪다가 중국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갑자기 외국 생활을 하려니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위한 모임도 많이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을 위한 변호를 많이 했던 우레이는 중국 당국이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중국 사회 아래(저층)의 ‘지하 운동’은 더 활발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의 모순이 커지면 저항도 커지기 마련이다. (중국 당국의 통제 밖에 있는) ‘지하교회’ 신도는 중국공산당 당원보다 많다. 인권변호사들이 법정 앞에서 직접 휴대전화로 억울한 사연을 생방송하면 20만명이 접속해 보기도 한다.”
우레이는 책장에서 제주 4·3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을 꺼내 들었다. 이곳에 모이는 중국인들이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서도 많은 토론을 한다며, 1980년 광주가 한국의 민주화에 미친 영향과 천안문 사건의 의미를 비교하기도 했다. ‘택시운전사’나 ‘화려한 휴가’ 같은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한국 영화도 보았다고 했다. 한국 민주화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중국의 변화에 대한 염원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20세기 초에 량치차오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꿈꿨던 중국의 개혁, ‘과학과 민주’라는 과제는 아직도 미완성이다. 그것은 역사이기도 하고 현실의 과제이기도 하다”고 했다.
도쿄의 유명한 서점 거리인 진보초의 한 건물 2층에도 비슷한 공간이 있다. 2022년 도쿄로 이주한 법학자 자오궈쥔이 지난해 12월 ‘이방인’(局外人)이란 간판을 걸고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 겸 강연과 토론 공간이다. 고 류샤오보와도 함께 활동했던 그는 “한 사람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고 중국의 개혁개방이 크게 후퇴하고 있다”면서 특히 두 자녀가 중국의 무비판적 애국주의 교육에 세뇌될 것이라는 우려가 중국을 떠난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역사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중국은 다 옳고 미국이나 다른 나라는 모두 나쁘다는 흑백의 교육을 하고 있다.”
그는 중국의 현실에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일본이 ‘생존공간’이 되고 있다고 했다. “중국 내 정치, 경제 압박이 너무 크고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은 불가능해졌다. 이전에는 홍콩이 중요한 생존공간이었는데 이제 홍콩이 완전히 통제되면서, 한자로 생활할 수 있고 문화도 친숙하며 중국 대륙에서 너무 멀어지지도 않는 일본으로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딱 한번 한국에 가봤는데 일부러 광주를 찾아갔다”며 “한국이 민주화를 해낸 것이 부럽다”고 했다.
‘랴오왕주간’, ‘봉황주간’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언론인이자 작가인 자자( 賈葭)도 2022년 2월 도쿄로 왔다. 그는 2016년 시진핑 주석 사임을 요구하는 글을 쓴 이후 중국에서 자신의 이름으로는 기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일본에 온 이후 해외 언론에 기사를 쓰고, 일본의 문화, 역사를 소개하는 유튜브도 운영한다.
그는 올해 천안문 35주년에 일본에서 2천~3천명의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추모 활동에 참여했다면서, ‘역사의 기억을 보존하는 공간’으로서 일본의 역할을 주목한다. “이전에는 홍콩이 ‘중국의 기억저장장치(USB)’라고 불렸지만, 이제는 그런 역할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일본의 의미가 더욱 커졌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그토록 많은 작가가 글을 쓰면서 망각되지 않도록 한 의미가 컸다고 생각한다”며 “역사가 후퇴하는 시기에도 우리가 계속 기록하고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천안문도 많은 중국인들은 국내에서는 알지 못하고 해외에 나온 뒤에야 알게 된다. ‘광주’가 한국인들에게 가졌던 의미처럼, 천안문도 중국인들에게 계몽의 전환점이 된다”고 했다. 그는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일본에서 하는 활동의 의미에 대해 “아직은 싹을 틔우는 맹아의 상태이고, 이 싹이 어떻게 자라나 중국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중국의 변화에 대비하면서 계속 준비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아코 도모코 도쿄대 교수는 ‘아시아 공동체’를 강조하면서,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과 일본 사회를 잇는 다리가 되어주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학자로서 오랫동안 중국 농촌 현장 등을 다니며 연구를 해왔고, 중국의 휘황한 발전 뒤에 있는 문제들에도 관심을 가졌다. 중국의 여러 비판적 지식인, 노동운동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을 일본에 초대해 깊은 교류를 해왔다.
지난 18일 도쿄대에서 만난 아코 교수는 “어제도 중국에서 ‘여행’ 명분으로 도쿄에 온 중국인 학자들과 비공개회의를 했다”며 “이들은 해외로 나온 뒤에야 비로소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고, 경제 침체, 지방정부 재정난, 민족주의적 선동, 대만과 관련한 전쟁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고 했다.
중국 당국은 일본이 중국인들의 ‘해방구’가 되는 것을 어느 정도 용인하고 있다고 아코 교수는 지적했다. “제로 코로나 정책을 거치면서 중국의 감시 시스템이 완성되었고, 서로 계속 의심해야 하는 심리적 압박과 신뢰의 위기가 심각해졌다. 이전에는 웨이보 같은 인터넷 공간에서는 어느 정도 솔직히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이 사회의 압력을 배출시키는 ‘가스 빼기’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그런 공간마저 줄어들었다. 중국 당국은 사회의 불만이 폭발하지 않도록 가스를 배출할 ‘배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향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에서 중국 예술가들도 ‘피난처’를 찾기도 한다. 지난 5월에는 난징의 가수 리즈가 일본의 여러 도시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중국 팬들이 이 공연을 보려고 일본에 왔다. 리즈는 천안문 광장에 대한 은유를 담은 ‘광장’ ‘부자유’ 등의 비판적 노래 때문에 몇년 전부터 중국 내에서는 공연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 관객들은 중국으로 돌아갔을 때 문제가 되지 않도록 휴대전화를 따로 보관하고 공연 영상이나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으로, 몇년 만에 외국 땅을 빌려 어렵게 진행된 공연을 관람했다. 리즈 외에도 공연 허가를 받기 어려워진 중국의 인디밴드들, 토크쇼 진행자들도 최근 일본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도쿄에서 중국의 미래를 고민하는 많은 이들은 단기간에 현실을 바꿀 쉬운 해법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함께 변화의 싹을 키워나가고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의 더 많은 이들이 마음의 벽을 허물고 힘을 보태기를 바라고 있었다.
8월 도쿄에서도 가장 번화한 긴자 한복판에 ‘단샹제 서점’(單向街 書店)이 문을 연 것은 큰 화제가 되었다. 중국의 유명한 비평가이자 작가인 쉬즈위안과 일본인 친구들이 함께 운영한다. 주말에는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여러 강연이 진행되는데, 중국인 유학생과 지식인이 많이 모인다. 쉬즈위안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일부러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서점 대표를 맡고 있는 마쓰모토 아야는 “긴자는 역사와 현대가 교차하는 곳이고 많은 사람이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곳이라서 이곳에 서점을 열었다”며 “처음 열었을 때는 거의 중국인 손님만 있었는데 지금은 중국인 절반, 일본인 절반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를 바라고 있는데 한국인은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고 아쉬워했다. 서점을 둘러보니 70% 정도는 중국어로 쓰인 책이지만, 한켠에는 한국 서적만을 모아놓은 코너도 있다. 아시아의 50명 사상가를 선정해 크게 붙여놓았는데, 중국의 량치차오, 루쉰,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마루야마 마사오와 함께 이광수, 윤동주, 박경리의 이름이 눈에 들어 왔다.
중국의 현실을 외부에서 알기도, 중국인들과의 마음을 터놓는 소통도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에, ‘망명자’들과의 만남은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동아시아의 진정한 공동체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20세기 초 량치차오와 루쉰의 고민을 1980년 광주와 1989년 천안문으로 이어가고, 함께 더 나은 동아시아로 나아가기를 꿈꾸는 이들이 그곳에 있다.
도쿄/글·사진 박민희 선임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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