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파업과 정태인 선생의 교훈 [하종강 칼럼]

한겨레 2024. 7. 3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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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의 주장들 중 “경제가 어려운 때일수록 노동자와 서민에 대한 집중적 지원이 위기를 벗어나는 지름길이 된다. 노동자와 서민의 경제 수준을 높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 뿐 아니라, 부자 감세보다 훨씬 더 경기 부양에 효과적이다”라는 내용이 눈에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지난 22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세미콘 스포렉스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총파업 승리 궐기대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삼성전자 노조가 장기 파업 중이다. 창사 55년 만에 발생한 ‘최초의 파업’이 이렇게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처음부터 짐작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을 것이다. 검색엔진 서비스가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을 보도하는 기사에 내 이름이 언급됐다고 알려준다. 검색해 찾아본 기사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날 연단에 오른 이현국 전삼노(전국삼성전자노조) 부위원장은 뜻밖의 인물을 거론했다. 평생을 노동문제 상담가로 살아온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교수였다. 이현국 부위원장은 ‘노동3권을 공부하면서 왜 헌법이 주위 분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파업까지 허락했는지 궁금했는데, 하종강 교수께서 답을 주셨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앉아 있는 수많은 급여 소득자에게 한 달에 50만원의 추가금이 지급된다면 그 돈이 어디로 갈까요? 결국 소비와 지출을 통해 사회에 환원되게 돼 있습니다. 내가 좀 더 나은 보상을 받음으로써 우리 지역 경제를 윤택하게 합니다. 이것이 노동운동을 하는 당연한 이유입니다.’”(‘시사인’ 875호, 이오성 기자, 2024년 6월24일)

일부 언론에서는 삼성전자 노조 집회에 “온갖 좌파 언론 매체들이 총출동해 ‘응원 취재’를 한 것”과 민주노총 인력이 행사 진행을 도운 것과 노조 간부가 집회 도중 하종강 교수의 이름을 거론한 사실을 두고 “온건 노선을 지향하는 듯”했던 전삼노가 “감추고 있던 발톱을 드러냈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는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보장된 노동자 파업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렇게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삼성전자 노동자들을 교육하면서 내가 정확하게 그렇게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세한 기억이 없다. 다만 비슷한 설명을 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사실 그 내용은 2년 전 폐암으로 작고한 경제학자 정태인 선생이 200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경제 이론을 설명해주는 강의에서 내가 배운 것을 조금 더 쉽게 풀어 번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우리나라 경제를 거의 초토화하던 무렵, 우리나라 17대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부터 “전 국민의 임금을 동결해야 한다”는 정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우리 세대는 어릴 때부터 “절약이 미덕”이라고 배워왔고 “독일 사람들은 성냥개비 하나를 쓸 때도 사람이 몇명 이상 모이지 않으면 켜지 않았다” 따위의 교훈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경제 위기를 맞아 온 국민이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고, 노동자들은 목소리를 낮춰 임금 인상을 자제하는 등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극히 당연한 논리처럼 횡행하던 무렵이었다.

폴 크루그먼의 여러 주장 중에서 “경제가 어려운 때일수록 노동자와 서민에 대한 집중적 지원이 위기를 벗어나는 지름길이 된다. 노동자와 서민의 경제 수준을 높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일일 뿐 아니라, 부자 감세보다 훨씬 더 경기 부양에 효과적이다”라는 내용이 눈에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에서 정태인 선생은 경제 분야 최고 인기 강사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명쾌한 강의를 나의 부족한 두뇌 능력에 의지해 기억나는 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부유층은 돈을 쓰고 싶을 만큼 쓰고도 여유 자금이 남은 사람들이어서 감세로 소득이 조금 올랐다고 해서 그 소득만큼 더 소비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부모님 같은 노동자와 서민들은 돈을 쓸 곳이 많이 있지만 없어서 못 쓰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서민들에게 들어간 돈은 바로 시장으로 풀려 고스란히 경제 성장의 윤활유가 됩니다.”

고 정태인 선생의 칼럼을 모은 책 ‘신랄하지만 따뜻하게’ 1, 2권과 논문을 중심으로 편집한 ‘정태인의 미래 키워드’.

내가 삼성전자 노동자들에게 했다는 노동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설명은 결국 정태인 선생의 흉내를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태인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그의 논문과 글을 모아 만든 책이 2주기를 가까이 앞두고 세권 출판됐다. 며칠 전 ‘고 정태인 추모 기념 글 모음집 온라인 북토크 ‘정태인 함께 읽기’’ 행사가 열렸다. 그의 칼럼을 모은 책 ‘신랄하지만 따뜻하게’ 1, 2권과 논문을 중심으로 편집한 ‘정태인의 미래 키워드’를 주제로 연구자, 정치인, 활동가들이 모여 온라인으로 대화를 나눴다. 목이 잠겨 말을 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가끔 나와 언쟁을 벌일 때면 “우리가 대학 다닐 때, 환갑 넘은 교수들 중에서 맞는 말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잖아. 형이 지금 그 나이가 된 거야. 형 생각이 틀린 거라고…”라며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나를 깨우치곤 했던 정태인 선생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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