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불평등이 만든 '격차'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이해
격차(제이슨 히켈 지음 /아를 / 464쪽 / 3만 원)
"우리의 꿈은 빈곤이 없는 세상입니다." 유엔 협력기구이자 국제 금융기관으로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세계은행 본부의 로비에 붙어 있는 슬로건이다. 세계은행과 함께 설립된 국제통화기금(IMF)의 공식적인 임무도 "세계의 경제적 불안정을 줄이는" 것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유엔을 비롯한 이 국제기구들이 펴내는 연례 보고서엔 '개발', '발전', '원조', '성장' 같은 표현이 각종 통계 데이터들과 함께 들어 차 있고 "선진국의 개발 노력 덕분에 빈곤과 기아 인구가 줄어들고 있으며, 세상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리고 이는 또다시 언론과 학자, 유명 인사 들을 통해서 '안심이 되게 하는 뉴스'로 대중에게 전파된다. 그들의 말처럼 세상은 정말 나아지고 있을까? 빈곤과 기아 인구가 줄어들고, 불평등은 해소되고 있을까?
유엔 인간개발보고서 통계자문위원, 유럽 그린뉴딜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신진 경제인류학자 제이슨 히켈은 '격차'(The Divide)에서 세상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주장이 미국과 유럽 선진국의 입맛에 맞게 가공된 신화라고 지적한다. 세계 인구의 60%가 넘는 약 43억 명이 인간의 역량이 훼손될 정도의 빈곤 속에서 불안정한 생계를 이어가는 반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단 8명의 부는 하위 인구 절반이 소유한 부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다. 이것이 진실이며, 이러한 극단적 불평등은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특정한 종류의 경제 체제, 즉 '자본주의'가 일으킨 결과다.
이뿐만이 아니다. 겨우 500년 전에 서구 유럽에서 생겨난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 문명은 극심한 환경 파괴와 기후의 복수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오늘날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에 직면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처럼 전례 없는 극단적 불평등과 기후 위기 앞에서 "실제로 효과를 낼 진짜 해법을 찾고 미래를 향한 길을 상상"하려면 세상이 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었는지 그 근원을 살펴봐야 한다. 이에 '격차'는 단단한 역사적, 지리적 맥락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삼아 풍부한 데이터와 여러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벼려냄으로써 대담하면서도 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한다.
누군가의 불행이나 실패의 원인이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가 게으르고 의지가 약하며 자신의 일에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융 위기 때문에 직장을 잃었을 수도 있고 노동자 보호법이 없는 상황에서 부당한 해고의 희생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대형 은행의 무분별한 주택 시장 투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의 고용주가 더 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생산 시설을 해외로 이전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그의 불행의 원인은 그 자신에게 내재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일 수도 있다. 글로벌 빈곤과 불평등을 바라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나라들은 왜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가장 큰 이유가 그 나라의 한계 때문이라고 답하곤 한다. 부패한 독재자, 선천적으로 게으른 민족성, 후진적인 문화, 부실한 거버넌스와 제도, 심지어는 경쟁력 있는 산업을 육성하기에 부적합한 기후를 요인으로 꼽기도 한다.
현상에 대한 인과관계만을 분석한다면 '가난한 나라들은 원래 가난해서 가난한 것이다'라는 답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빈곤과 불평등과 기후 위기가 선진국의 막대한 원조 예산 및 호혜적인 개발 노력에 의해 극복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 역시 현실과 무관하게(또는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면서) 무한 반복될 것이다. 제이슨 히켈은 그 이야기들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더 큰 진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역사'라는 차원을 가져온다. 그럼으로써 훨씬 더 방대하고 복잡하며 심각한 함의마저 지닌 빈곤과 불평등의 기원, 그 이면에서 드러내놓고 때로는 은밀하게 작동해온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민낯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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