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양궁' 맏형은 냉정, 막내는 열정… "앞 사람 실수하면 뒷사람이 잘하면 돼"
파이팅 외치는 막내 김제덕 사기 북돋아
이우석은 중간 역할 하며 긍정 에너지
텐(10), 텐, 텐. 열대야를 날려 버릴 시원한 10점 행진, 이보다 완벽할 수 없었다.
2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레쟁발리드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남자 양궁 단체전에서 3연패를 달성한 태극 궁사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8강부터 결승까지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는 ‘퍼펙트 금메달’을 명중시켰다. 특히 개최국 프랑스와 결승전에선 승부의 분수령이 된 2세트에 시작부터 10점을 5발 연속 꽂아 홈 관중의 함성을 잠재웠다.
남자 양궁이 역대급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키워드는 ‘머리는 비우고, 가슴은 뜨겁게’다. 맏형 김우진(청주시청)은 어떤 상황에서도 잡념 없이 냉정함을 유지했고, 막내 김제덕(예천군청)은 시종일관 ‘파이팅’을 외치며 사기를 드높였다. 이우석(코오롱)은 김우진과 김제덕의 중간 역할을 소화하면서도 긍정 에너지를 발산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단체전과 2020 도쿄 올림픽 단체전 우승 경험이 있는 김우진은 이번에 처음 최고참으로 나섰다. 도쿄 대회까지는 든든한 맏형 오진혁이 있었지만 이제는 직접 두 명의 후배를 이끌고 가야 했다.
김우진이 후배들에게 강조한 건 팀워크였다. 그는 “세 명이 다 고르게 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만회하려고 하면 안 된다. 앞에 사람이 실수하면 뒷사람이 더 잘해주면 되고, 그다음 사람이 더 잘해주면 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김우진은 세 명 중 가장 부담이 큰 3번 사수 역할을 직접 떠안았다. 맨 마지막에 쏘는 3번 사수는 자신의 한 발로 인해 승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상당한 압박이 뒤따른다. 리드하고 있을 때 잘 쏘면 본전, 못 쏘면 역적이 되는 자리다.
3번 역할은 줄곧 김제덕의 몫이었지만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김우진이 3번을 대신하면서 김제덕은 2번으로 옮겼다. 원래 김우진의 1번 자리는 이우석이 대신했다. 김우진은 “3번이 부담스러운 자리지만 맏형으로 다른 선수들이 더 편하게 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순서 변경은 신의 한 수였다. 맏형이 뒤를 든든하게 받치자 후배들은 마음 편히 쐈다. 결승에서는 이우석과 김제덕이 10점 퍼레이드를 펼치고 함성을 내지를 때 들뜨지 않고 냉정함을 유지해 자신의 마지막 발로 마침표를 찍었다.
도쿄 올림픽 당시 ‘파이팅’ 아이콘이 된 김제덕은 이번에도 8강전부터 결승전까지 특유의 파이팅을 외치며 동료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다만 관중석이나 TV 중계로는 김제덕의 파이팅이 잘 들리지 않았다.
도쿄 올림픽 때는 코로나19 여파로 무관중 경기를 치러 김제덕의 파이팅이 유독 크게 들렸지만 파리 올림픽은 관중이 8,000석을 가득 메워 파이팅 소리가 관중의 함성에 묻혔다. 그럼에도 김제덕은 “더 크게 파이팅을 해서 자신 있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쉴 새 없는 파이팅에 8강전을 마친 뒤 심판으로부터 주의를 받기도 했다. 김제덕은 “심판 측에서 상대 선수들을 보고 파이팅을 한 것으로 보고, 약간 도발한다고 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상대 선수를 도발하려는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김제덕은 “(4강전부터는) 우리 팀 선수들과 감독님을 보고 파이팅을 외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단체전 우승에 대한 지분은 본인이 하나도 없다고 강조했다. ‘파이팅 응원’ 지분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제덕은 “정말 없다”고 손사래를 친 뒤 “김우진, 이우석 두 형이 정말 잘해줬다. 팀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마다 형들이 정말 잘 쏴서 우승할 수 있었다”고 공을 돌렸다.
간절함이 무기였던 이우석은 '2전 3기'로 나간 올림픽에서 금메달 한을 풀 듯 연신 화살을 중앙에 꽂아 이번 대회 에이스가 됐다. 19세 나이로 도전한 2016 리우 대회 최종 선발전에서 4위로, 3위까지 주어지는 올림픽 티켓을 한 끗 차로 놓쳤고, 2020 도쿄 올림픽 땐 당당히 선발됐지만 코로나19 확산 여파로 대회가 1년 미뤄져 못 나갔다. 1년 뒤 열린 선발전에선 탈락했다.
돌아보면 지난 아쉬운 과정들을 마음에 담아둘 법도 한데 이우석은 긍정의 힘을 믿었다. 그는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고, 사람마다 시기가 다를 수 있다. 나는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파리 = 김지섭 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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