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노동자들이 대대적인 ‘실태조사’ 나선 까닭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가 30일 서울 구로구 디지털산업단지에서 ‘커피차’를 통해 IT 노동자들의 실태조사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노도현 기자

폭염이 기승을 부린 30일 오전 서울 구로구 디지털산업단지 한복판에 민트색 ‘커피차’가 등장했다. 이 일대 노동자들에게 시원한 커피와 레모네이드를 무료로 제공했다. 커피차에 놓인 안내판에는 “건강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으십니까”라는 문구와 함께 설문을 위한 큐알(QR)코드가 담겼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IT위원회는 이날부터 8월31일까지 약 한 달간 정보기술(IT) 산업·노동자 실태조사를 벌인다고 밝혔다. 소규모 회사가 많은 구로·가산 디지털단지를 비롯해 판교 테크노밸리 등에서 일하는 모든 IT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다. 목표는 1000명 이상으로, 온라인 설문과 오프라인 심층 면접 조사를 병행한다.

IT위원회는 2018년 네이버를 시작으로 넥슨, 넷마블, 스마일게이트, 씨디네트웍스, 엔씨소프트, NHN, 웹젠, 인터파크야놀자, 한글과컴퓨터 등에서 화섬식품노조 내 지회를 설립했다. 장시간 노동과 조직문화 개선을 위해 노력하며 포괄임금제 폐지 등을 이끌어냈다.

대대적인 조사에 나서는 건 여전히 노조가 없는 사업장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고, 그 실태조차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세윤 IT위원장 겸 네이버지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이대로 가면 노조가 있는 사업장은 계속 노동조건이 개선되는데 노조가 없는 사업장은 그렇지 못해 격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넷마블 과로사·과로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일로 IT 업계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알려지고, 여러 노조가 생기게 됐다”면서도 “아직도 많은 IT 노동자들은 노조 설립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 관계자들이 30일 서울 구로구 디지털산업단지에서 IT 산업·노동자 실태조사 시작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노도현 기자

노조가 있는 IT 회사는 대부분 규모가 큰 사업장이다. 중소 사업장에선 구성원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어도 노조 설립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IT위원회는 산별교섭이 아닌 기업별 교섭만을 보장하는 한국 노동법 등을 업계 전반적인 노동권익 향상의 걸림돌로 꼽았다.

그간 IT 업계 내에서 장시간 노동과 고용 불안, 불안정한 조직 문화 등으로 인해 중대 문제가 발생한 사업장의 사례는 많이 부각됐다. 하지만 산업 전체적으로 정확한 실태를 파악한 자료는 없는 실정이다. 장시간 노동의 사례를 봐도 다수의 IT 회사들이 포괄임금제를 시행하며 근무시간 기록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IT위원회는 “기존에 고용노동부 등에서 파악한 근무시간은 기록이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회사 질의를 통해 파악한 근무시간이라 제대로 된 실태를 담고 있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고용불안 사례의 경우 사실상 해고에 가깝지만 형식상으로는 권고사직 형태로 이뤄지다보니 파악하기 어렵다. IT위원회는 “IT·게임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향상을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선 산업 및 노동 실태부터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IT위원회는 향후 기자회견과 국회 토론회를 통해 실태조사 결과를 공유하고 IT 업계 전반에 걸친 노동조건 개선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