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지와 무기력 사이…與 ‘111시간 필리버스터’가 남긴 것들

구민주 기자 2024. 7. 30.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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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방송4법’ 맞서 5박6일 무제한 토론…역대 최장 2위
거야 의해 번번이 중단‧법안 통과…결국 ‘거부권’ 정국으로
‘끝까지 저지’ 명분 쌓았지만 ‘누구를 위한 토론?’ 무력감도

(시사저널=구민주 기자)

우원식 국회의장이 29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서 '방송 4법'인 방송문화진흥회법(방문진법) 필리버스터 진행 중 피곤한 듯 눈가를 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거대 야당은 거칠었고 소수 여당은 무력했다…토론 없는 '유제한 토론'"

5박6일, 총 111시간27분간의 국회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일정 방해)을 지켜본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평가했다. 2016년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192시간27분)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길었던 필리버스터 정국은 국민의힘이 대통령실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건의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여야를 불문하고 관심도 감동도 없는 '소모전'만 벌였단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은 30일 오전 한국교육방송공사법(EBS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24시간40분 만에 강제 종결하고 법안을 상정했다. 재석 의원 189명 전원 찬성으로 EBS법까지 의결되면서, 야당이 단독 강행하고 여당이 하나하나 토론으로 막아 세웠던 '방송4법'은 모두 본회의를 통과했다.

'방송4법'은 방통위 의결 정족수를 현행 상임위원 2인에서 4인으로 변경하는 내용, KBS·MBC·EBS 등 공영방송 이사 숫자를 대폭 늘리고 이사 추천권을 언론·방송 학회와 관련 직능단체에 부여하는 방안 등을 골자로 한다. 국민의힘은 이를 '좌파 방송 영구 장악법'으로 규정하고, 지난 25일부터 법안 하나하나마다 필리버스터를 실시했다.

5박6일 간 펼쳐진 국회 본회의장 모습은 이러했다. '본회의에 방송4법 중 한 개 법안 상정→여당의 필리버스터 신청 및 진행→24시간 후 야당 주도로 필리버스터 종결 동의안 제출 및 통과→여당 퇴장 속 야당의 법안 단독 표결→다음 법안 상정→여당의 필리버스터 재시작'. 그 과정에서 양측 간 협상의 여지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야당은 토론 강제 종료 후 법안 통과를, 여당은 대통령 거부권 행사 요청을 향해서만 내달렸다.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이 지난 29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방송 4법' 본회의 통과를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를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힘없는 이미지만 부각" "그래도 싸워야지"

긴 시간 체력전을 치렀음에도 여당은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는 안팎의 평가가 지배적이다. 여론의 관심을 키우고 각 법안의 부당함을 설득해야 했지만 큰 주목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전당대회·파리 올림픽 등 외부 영향도 있지만, 토론에 나선 의원들이 국민 설득을 위한 촘촘한 전략을 세우지 않은 채 시간을 때우는 데만 급급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또한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시급한 '민생 법안'이 아니란 점에서도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단 분석이 나온다.

당내에선 어차피 거대 야당의 법안 통과를 막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감지되기도 했다. 당초 '1법안1필리버스터' 전략에 회의감을 내비쳐 온 한 국민의힘 의원은 통화에서 "힘없는 여당 이미지만 키운 게 아닌가 싶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되레 야당에 토론 주도권을 내주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여당 의원들이 수시로 본회의장을 비우면서 우원식 국회의장이 "국민의힘 의원들이 필리버스터를 제기했는데 단 한 분도 안 계신 건 매우 유감"이라고 공개 지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필리버스터를 통해 '거야에 끝까지 맞섰다'는 최소한의 '명분'을 얻었단 자체 평가도 있다. 지지층 사이 '여당이 투쟁 의지를 잃었다'는 비판이 많았는데, 이를 조금은 불식시키는 시간이었단 얘기다. 김용태 의원은 29일 13시간12분이라는 필리버스터 역대 최장 기록을 세워 그가 한 발언들과 함께 폭넓게 회자되기도 했다. 한 국민의힘 중진 의원은 통화에서 "'실익'은 없더라도 집권여당이 끝까지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필요한 일"이라며 "오히려 야당의 '비난'과 '폭주' 이미지는 더 강화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8일 새벽 국회 본회의에서 '방송법 일부개정법률안'에 관한 무제한 토론을 마친 박선원 의원을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野, 고성·욕설로 맞불…'尹 탄핵 명분용' 의심 키워

방송4법은 모두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야당도 필리버스터 정국을 통해 특별히 얻은 건 없다는 평가가 많다. 결과적으로 방송4법은 다시 대통령 거부권에 의해 수일 내 국회로 되돌아올 예정이다. 법안 통과 과정에서 여당과 극한 충돌을 빚은 만큼, 여당 내 이탈표가 나올 리 만무하다. 이 경우 법안은 결국 앞선 사례들과 같이 폐기 수순을 밟을 전망이다. 여당에서 "법안 통과보다 대통령의 거부권을 유도하고 탄핵 명분을 쌓으려는 게 야당의 본심"이라고 지적하는 이유다.

맞불 토론에 나섰던 일부 야당 의원의 거친 언행도 연일 비판을 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27일 오후 단상에 선 박선원 민주당 의원은 윤석열 정부의 '공영방송 장악 시도'가 박근혜 정부 당시 '계엄령 문건'과 비슷하다고 주장해 우원식 의장으로부터 "주제에 충실해 달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국민의힘 의석을 향해 고성을 쳤고 급기야 마이크를 치운 후 "이 새X들이"라고 말한 것으로도 전해졌다. 야당 의원들 역시 전당대회 합동연설회 참석 등을 이유로 상당수가 내내 본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도 했다.

여야 모두 낙제점을 받은 채 긴 필리버스터는 막을 내렸지만, 8월 중 같은 정국이 한 번 더 펼쳐질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민주당이 곧장 '노란봉투법'과 '민생회복지원금법'(전국민 25만원 지급)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미 결말이 정해진 토론 없는 유제한 토론은 '누구를 위한 필리버스터였느냐'는 세간의 혹평과 무관하게 앞으로도 재차 반복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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