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마크 택한 유도소녀 허미미 “다음 올림픽에선 꼭 애국가 부르고 싶어”
2002년생 허미미는 ‘메이크업’이 취미다. 화장하며 예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웃음이 많은, 아직 앳된 소녀다. 그러나 보기 드물도록 강한 몸과 마음을 가졌다.
한국 여자 유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미정 여자 유도 대표팀 감독은 “미미는 힘이 장사는 아닌데 안 지친다. 운동할 때도 심박수가 거의 수면 상태다. 땀도 별로 안 흘리고 숨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헉헉대도록 운동하면 넌 얼마나 더 잘 할까’라고 내가 가끔 농담도 한다”고 말했다.
허미미는 긍정의 소녀다. 김미정 감독은 “파리에 오기 전 선수들 단체로 심리테스트를 했다. 미미는 불안과 부정이 제로로 나왔다. 그런 선수는 거의 없다. 훈련 시간에 내가 화를 내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요~’ 하면서 헤헤 하고 웃는다. 대범하다. 그리고 유도를 정말 좋아하는 아이”라고 귀띔했다.
항상 웃고 있지만 지치지 않고 단호하게 긍정적으로 한 길을 걷는 소녀, 허미미는 스무살에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일본 도쿄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허미미는 재일교포 3세다. ‘유도천재’라 불렸고 일본의 유도 명문 와세다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2021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는 “한국 선수로 유도를 해서 금메달을 따면 좋겠다”고 하셨다. 태어나면서부터 일본과 한국 국적을 모두 갖고 있던 스무살 소녀 허미미는 그 길로 일본 국적을 포기했다.
2022년 2월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을 통해 허미미는 대한민국의 유도 국가대표가 됐다. 빠른 시간 안에 존재감을 키워나간 허미미는 지난 5월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57㎏급 챔피언에 올랐다. 1995년 정성숙(61㎏급), 조민선(66㎏급) 이후 29년 만에 한국 여자 유도에서 세계챔피언이 나왔다.
그리고 지난 30일, 허미미는 한국 여자 유도에 8년 만에 올림픽 메달을 안겼다.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드마르스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여자 57kg급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 올랐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김미정(72㎏급),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조민선(66㎏급) 외에 없었던 한국 여자 유도의 올림픽 금메달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정보경(48㎏급)의 은메달을 마지막으로 올림픽에서 침묵했던 한국 여자 유도에 값진 은메달을 다시 안겼다.
세계랭킹 3위인 허미미는 5월 세계선수권에서 꺾었던 세계랭킹 1위 크리스타 데구치(캐나다)와 올림픽 결승에서 다시 만났다. 연장전(골든스코어)까지 간 뒤 적극적으로 공격하면서 방어하는 데구치와 접전을 벌였으나 마지막에 위장공격으로 지도를 받으면서 반칙패 했다.
아쉬움 남는 마지막 판정에 많이 속도 상했지만 긍정 소녀 허미미는 곧 밝게 웃었다. 금메달을 못 따 아쉽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바라신대로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발음이 서툴뿐 한국어를 다 알아듣고 잘 말하는 허미미는 결승전을 마친 뒤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한국에 온 뒤 올림픽 준비를 정말 열심히 했는데 메달을 딸 수 있어서 좋다. (금메달이 아니니까) 기분이 너무 좋은 건 아닌데 그래도 (메달을 따) 조금 좋다”고 밝게 웃었다.
금메달을 따면 울려퍼질 애국가를 멋지게 부르기 위해 가사를 다 외워왔지만 부르지는 못하게 된 허미미는 “연습해왔는데 너무 아쉽다. 다음 올림픽에는 꼭 부르고 싶다”며 “이번에 올림픽을 치르면서 태극마크를 택한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고 (태극마크 달고) 결승까지 가서 행복하다. 다음 올림픽에 나가서는 꼭 금메달을 따겠다”고 했다.
자신을 ‘대한민국 유도선수 허미미’로 이끌어준 할머니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허미미는 “할머니가 한국선수로 나가서 금메달을 따면 좋겠다고 하셨다. 어릴 때부터 나를 엄청 예뻐해주셨기 때문에 할머니를 믿고 할머니 말대로 한국을 택해서 왔다. 그래서 이렇게 한국에서 은메달을 땄다”며 “할머니께 금메달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 아쉽다. 그래도 메달을 보여드리게 돼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믹스트존에서 한국 취재진과 인터뷰가 끝날 무렵, 많은 일본 취재진이 허미미를 둘러쌌다. 일본 선수였는데 한국 선수가 되어 올림픽에 나간 허미미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는지 오랫동안 질문이 이어졌다. 시상식을 마친 뒤 공식 기자회견장에도 일본 취재진은 가득했다.
한국 취재진 한 명이 질문했다. 조금 긴 질문 뒤 “혹시 일본어가 편하시면 통역이 있으니 일본어로 답해줘도 괜찮다”고 했다. 허미미는 한 마디씩 힘주어 한국어로 대답했다.
파리 | 김은진 기자 muldero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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