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재개봉한 ‘그랑블루', 박찬욱은 왜 과대포장이라 했을까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80번째 레터는 최근 재개봉한 영화 ‘그랑블루’ 입니다. 이 영화를 좀 더 일찍 보내드렸어야 하는데, 뉴스성이 좀 더 높은 영화 앞세우다보니 순서가 좀 밀렸네요. CGV 단독 개봉인데, 아직 걸려 있습니다. 시간대는 늦은 밤시간대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 같은 날씨엔 큰 스크린으로 이 영화 보시면 기분 전환이 좀 되지 않으실지. 그 전에 먼저, 79번째 레터로 보내드렸던 ‘데드풀과 울버린’의 개봉 성적 뉴스부터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말씀드린 대로 R등급 최고 기록을 세웠네요.
‘데드풀과 울버린’의 오프닝 주간 성적은 북미 2억1100만달러입니다, 글로벌은 무려 4억4430만달러. 예측보다 1억달러 이상 높게 나왔죠. 뉴욕타임스는 “‘데드풀과 울버린'이 마블의 슬럼프 기세를 반전시켰다”고 기사 제목을 뽑았네요. 누적 10억달러 달성은 무난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내 성적은 그렇게까지 좋진 않습니다. 개봉 주 108만명 조금 넘었는데, ‘데드풀1′이 첫 주 171만명, ‘데드풀2′가 197만명이었으니까요. 단, ‘데드풀1′과 ‘데드풀2′는 코로나 전에 개봉했다는 점에서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기는 무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코로나 이후 영화 시장은 그전과는 완전히 다르니까요. 숫자만 단순 비교하기에는 좀.
그래도 디즈니에선 아쉽다고 생각하겠네요. 라이언 레이놀즈와 휴 잭맨이 방한해서 온갖 방송이며 유튜브는 죄다 출연하고 간 것 같던데요. 국내 관객 의견은 갈리는 것 같습니다. 마블 좋아하시는 분들이 실망한 경우가 많지 않나 싶은데, 혹시 이번주 조정석의 ‘파일럿’이 개봉한 후에도 ‘데버린’이 흥행을 어느 정도 이어가면 후속편으로 스포일러로만 채운 레터를 추가로 준비해보겠습니다. 영화 보신 분들 중에서도 깜짝 등장인물을 못 알아보시거나 “걔들이 뉴규? 왜 반가워?” 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서요.
자, 그럼, 오늘의 주인공 ‘그랑 블루’ 모셔보겠습니다. 1988년 작인데 국내에선 1993년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 포스터 모르시는 분 드물죠. 뤽 베송이 이 영화로 떴고요. 제가 최근의 여러 재개봉작 중에서도 ‘그랑블루’를 레터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박찬욱 감독님 때문입니다. 그 분이 ‘과대평가된 영화 10편’ 중 하나로 이 영화를 꼽으셨거든요. 어디서? 박찬욱 감독님 영화평 모아놓은 저서 ‘박찬욱의 오마주’에서요.
최근에 개정판이 나온 걸로 아는데, 저희 집에 있는 건 2005년 출간본입니다. 초판은 이보다 더 전, 그러니까 1998년이던가에 나왔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펴고, 어렴풋한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다 혼자 깔깔 웃었습니다. 뭐랄까, 읽다보니 박 감독님 음성지원이 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제가 갖고 있는 ‘오마주’ 2005년판 기준, 488쪽 ‘우상의 영화, 우상이 된 영화’ 부분에 ‘과대평가된 영화 10편’이 나옵니다. 그 10편이 무엇이냐, ‘메탈 자켓/하나비/로스트 하이웨이/싸이코/중경삼림/그랑 블루/씬 레드 라인/다크 시티/시민 케인/올리버 스톤의 킬러’. 이상 10편입니다.
음성지원의 사례를 (들어)보실까요. 예를 들어 ‘중경삼림’을 두고 이렇게 쓰셨습니다. ‘고독한 게 뭐 자랑인가? 고독하다고 막 우기고 알아달라고 떼쓰는 태도가 거북하다. 특히 타월이나 비누 붙들고 말 거는 장면은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하하하. 그렇게 보실 수도 있군요. 흠. 그런데 양조위가 비누에게 말 거는 장면은 그저 순수하고 쓸쓸한 자기 위로가 아니었는지. 흠흠. 감독님 연출 취향은 아니었던 걸로. (왕가위 지못미)
그렇다면 ‘그랑 블루’에 대해선 뭐라고 쓰셨는가. ‘물 속에서 숨 오래 참기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바다 속 풍경의 아름다움이라면 ‘아틀란티스’ 쪽이 차라리 낫다.’ 아…………………. 그, 그, 그렇게 보셨단 말씀이죠…. 흠. 아마도 박찬욱 감독님은 감정 표현이 박 감독님이 생각하는 적정 수준 이상으로 넘쳐흐르거나 진해지면 못 견뎌하시는 게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그런데요, ‘그랑 블루’가 ‘물 속에서 숨 오래 참는 건 어마무지하게 대단한 일이야!’라고 말하는 영화는 아닌게 아닌지. ‘바다 속 풍경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영화도 아니고요. 실제로 바다 속 풍경은 거의 안 나오고요. 바다 속 장면은 주인공 자크의 아버지가 사고사를 당하는 초반부 정도. 그것도 아주 짧게 나오고 곧이어 어린 자크가 물 밖에서 ‘아빠! 아빠! 아빠!’라며 울부짖는 장면으로 바로 넘어가죠. 자크에게 바다 속은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유일한 가족이었던 아빠를 데려가고 친구가 잠든 곳이기에 돌아가야할 집일뿐. ‘그랑 블루’에서 잠수부 엔조(장 르노)가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에게 던진 대사는 뤽 베송이 박찬욱 감독님께 하고 싶을 말일 거 같네요. “당신이 바다에 대해 뭘 알아?!!”
‘그랑 블루’와 박찬욱 감독님 얘기하면서 레터 독자분들께 저의 오랜 주장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 재밌는 영화인지, 명작인지 졸작인지, 과포인지 아닌지는 순전히 보는 이 각자에게 달렸다는 것을요. 듣고보면 당연한 말인거 같지만, 흔히 한 영화에 대해 절대적인 판결이 가능한 것처럼 여기니까요. 특정 의견, 혹은 그 의견이 주도하는 분위기에 휩쓸리죠. 심지어 평단에서도요. 적어도 영화에 있어서는 일반 관객 한 명 한 명이 가진 각자의 기준이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나만이 좋아하는 대사, 나만이 간직한 장면 같은. 그런 게 쌓이고 쌓여 가치가 되는 것이겠고요. 혹시 누군가는 영화 ‘올드보이’를 보고 이렇게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갇혀서 군만두 먹기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근친상간의 충격이라면 ‘폴라X’ 쪽이 차라리 낫다'. (물론 저는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예술 비평의 상대성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또 너무 장황해지니 이 부분은 여기까지.
제가 생각하는 ‘그랑 블루’는 만원 지하철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앞뒤 승객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옴쭉달싹 못할 때, 마음을 순간이동시키기에 이보다 더 좋은 영화가 없어요. 마지막 장면에서 자크는 사랑한다며 곁에 있어달라고 매달리는 조안나에게 말하죠. “나는 가서 봐야할 게 있어.” 조안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답을 합니다. “뭘 본다는 거에요. 거긴 아무것도 없어요. 밑은 춥고 어두워요. 난 여기 있잖아요.” 과연 자크가 보려는 게 그 아래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갈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줄 알면서 원할 수 밖에 없는 것에 대한 영화. 그 마음이 진정으로 얻을 수 있는게 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색깔로 그려본다면 파란 색이지 않을까, 그 색을 화면에 담아본다면 이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그랑 블루’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음악, 에릭 세라'의 ‘마이 레이디 블루’ 음악을 아래에 붙입니다. 혹시 사무실에 계시거나 뭔가 골치 아픈 일을 하고 계신다면 한 번 들어보세요. 여러분의 마음 아래에 어느새 바다가 출렁일지도요. 이 가사와 함께. “I’m looking for something that I will never reach.”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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