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규의 코칭 스토리] 경복고 임성인 코치 “우리 팀의 가장 큰 경쟁력은요...”
[점프볼=조원규 칼럼니스트]
‘코칭의 시대’라고 합니다. 코칭은 스포츠에서 나왔습니다. 아마농구 10년 이상 혹은 한 팀에서 5년 이상 선수들을 지도한 코치를 찾아 코칭의 철학과 노하우를 들었습니다.
“경복고 수비가 용산고를 보는 것 같네요.”
제61회 춘계전국남녀중고농구연맹전이 열렸던 3월의 해남. 관중석에서 경복고 경기를 지켜보던 농구 관계자의 말입니다. 이 대회에서 경복고는 평균 62.3점만 실점했습니다. 결선 4경기 평균 실점 64.5점, 결승전 실점이 63점이니 대진운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대회에서 경복은 전승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용산고를 연상시키는 키워드는 강한 수비, 조직력, 투지입니다. 경복고는 용산고와 비교해 자유로운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임성인 코치 부임 이후 경복고의 색깔이 달라졌다는 평가입니다. 임 코치의 지론은 “농구는 5명이 한다”라는 것입니다.
농구는 5명이 합니다.
경복고는 대한민국 농구를 대표하는 명문입니다. 2010년대 초반에는 문성곤, 최준용, 이종현 등 특급 유망주들이 모이며 ‘레알 경복’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모였던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에 빗댄 별명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건 사고에 휘말리며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2021년 KBL 드래프트 1라운드 명단에는 경복고 출신 선수가 3명이었습니다. 그런데 2022년에는 1라운드에 지명된 선수가 없었습니다. 2023년은 드래프트에 지명된 경복고 선수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임 코치가 부임한 시기는 2022년 드래프트 대상자가 고3이던 2018년 10월입니다. 전임 코치의 불미스러운 일로 팀 분위기는 어수선했습니다. 연계 학교인 삼선중 선수들도 경복고 진학을 주저했습니다.
부임하자마자 삼선중 선수들을 만났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다른 학교로 진로를 결정한 선수가 많았습니다. 주변에서는 “경복고에 오고 싶다는 전화가 많이 올 거야”라고 얘기했지만, 오고 싶다는 전화는 단 한 통에 불과했습니다. 선수 수급부터 힘들었습니다.
대학 진학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습니다. 대학과 연습경기 일정을 잡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연습경기는 대학에 우리 선수를 알리는 장이기도 합니다. 연습경기 거절은 그 학교 선수를 보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대학 감독들은 “지금부터 2, 3년은 진학을 못 해도 임 코치 책임이 아니야”라고 위로했습니다. 물로 그 말은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대학 진학을 못 한다는 것은 농구를 그만둔다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요.
2, 3년은 임 코치 책임이 아니야
그 시기가 특별히 더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시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연서중 체육관을 찾았을 때, 농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좋은 일보다 힘든 일이 더 많았습니다. 경복고로 진학했을 때가 그래도 좋았습니다. 선생님이 기회를 많이 주셨습니다. 고3 때는 준우승만 두 번을 차지했습니다.
“두 번 다 결승에서 패했습니다. 당시 멤버가 좋은 것은 아니었어요. 센터가 187센티였습니다. 현주엽이 있던 휘문고가 최강이었죠. 두 번 모두 휘문에게 졌습니다. 경기 시작해서 37분은 이겼어요. 딱 3분을 졌죠.”
임 코치는 선수들이 좋다고 성적도 좋은 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멤버가 안 좋아도 똘똘 뭉치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으면 충분히 성적을 낼 수 있다. 해보겠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중요했습니다. 고교 시절, 경복고를 만나는 팀은 주눅이 들었다고 회고합니다.
“몸을 푸는 방법부터 달랐어요. 포스가 있었죠. (어떤 거죠?) 이를테면 크게 손뼉 치면서 러닝을 하는 거죠. 우렁찬 목소리로 손뼉을 치면서 달리면 상대가 위축되는 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사라졌는데…. 다시 살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선수들이 좋아할지 묻자 “어! 이거 뭐야, 하겠죠”라면서 웃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최고의 학교에서 뛰고 있으니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자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해보겠다는 마음”과 같은 맥락입니다.
물론 경복고에서의 선수 생활이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임 코치에게 농구가 싫었던 적이 많습니다. 경복고 1학년도 그런 시기였습니다.
“고1 때 농구 외적인 문제로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제일 열심히 할 시기에 그렇게 못한 것이 아쉽죠. 그 경험이 있어서 제자들에게 고등학교 때가 얼마나 중요한지 얘기를 많이 합니다.”
신체 능력, 기술과 함께 5대5 농구의 이해도가 크게 높아지는 것이 고등학교 시기입니다. 고등학교에서 기초를 단단하게 만들수록 대학과 프로에서 성장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그 귀중한 3년 중 1년이나 방황한 것이 못내 아쉬운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가 정말 중요합니다
중앙대로 진학한 이후에는 기회를 잡기 힘들었습니다. 김승기, 김영만, 김희선, 구병두 등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임 코치가 졸업한 해에 처음으로 KBL 드래프트가 실시됐습니다. 출전 기회가 적었던 임성인은 지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실업팀 창단 열풍이 불었습니다. 선배들은 모두 창단 팀으로 갔습니다.
“대학은 경쟁이 치열했어요. 제 자리가 없었죠. 드래프트에 떨어지고 바로 군대에 갔습니다. 농구가 아닌 새로운 길을 찾고 싶었어요. 2001년 1월 1일에 제대하고, 1월 6일에 (경복고 시절 은사인) 김승기 선생님께 인사드리러 갔는데 그 자리에서 코치 제안을 받았습니다.”
농구가 싫어 군대에 갔는데, 그곳에서 지도자로 다시 농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마침 당시 신림고에 코치가 없었습니다. 임 코치는 27살의 어린 나이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쉽지 않았지만, 보람도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레이업도 못 했어요. 대부분 중학교 2학년, 3학년 때 시작했죠. 잘하는 선수들은 좋은 학교로 갑니다. 그래서 선수 수급도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1년에 한 번은 4강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선수들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신임 부장이 특정 학교 출신을 코치로 앉히려 했다고 임 코치는 얘기합니다. 이제는 정말 농구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교인 연서중에서 간곡한 요청이 왔습니다. “모교를 맡고 싶은 마음은 있었나 봐요”라며 임 코치는 웃었습니다.
모교인 중앙대 코치를 거쳐 다시 모교인 경복고로 왔습니다. 경복고에 왔을 때는 만 17년 경력의 베테랑 지도자입니다. 애증이었던 농구는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중학교 선수부터 대학교 선수까지 지도한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 됐습니다.
그 경험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농구는 5명이 하는 것이다”입니다. 임 코치는 그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 대학에서 또 프로에서 어떤 유형의 선수를 좋아하는지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도 꼰대죠(웃음). (선수들이) 저랑 얘기하는 게 편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런데 그게 제 일입니다. 좋은 피지컬과 기술이 있다고 좋은 선수가 되지는 않아요. 좋은 선수가 되려면 5대5 농구를 잘해야죠. 그런 팀이 좋은 팀입니다.”
좋은 피지컬과 기술이 있다고...
경복고는 올해 2관왕입니다. 올해 치른 3번의 전국대회 중 2번 우승했습니다. 시즌 전부터 올해 최강은 경복이라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우수한 선수들이 많고 포지션 밸런스가 좋습니다. 높이는 최강이고 선수층도 두텁습니다.
결국 선수가 좋아야 성적도 좋은 것 아닌지 임 코치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선수가 있어야 한다”라는 것이 임 코치의 대답입니다. 그러나 “선수가 좋다고 우승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도 반복했습니다. 좋은 선수들을 하나의 팀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경복고는 1학년 윤지원과 윤지훈이 주전으로 뛰고 있습니다. 공을 갖고 플레이하는 시간도 많습니다. 3학년 이근준과 이병엽은 궂은일을 많이 합니다. 특히 주장 이근준은 4쿼터 중반까지 속공 마무리를 제외하면 단 하나의 필드골도 던지지 않은 경기도 있습니다.
“팀 분위기가 중요하죠. 뭔가 하려고 하는…. 개인마다 생각이 다 다른데, 그것을 하나로 모아야죠. 농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5명이 하니까요. (부족한 부분을) 서로 메꿔주는 거죠.”
임 코치는 농구가 싫을 때가 있었습니다. 지나 보니 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었습니다. 같은 환경이지만 열심히 했던 동료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며 웃습니다.
중앙대 코치 시절. 드래프트 1순위가 유력한 장재석(울산 모비스)가 중국 진출을 고민했습니다. 크고 힘이 좋은 선수들과 경쟁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KBL에서 외국인 선수와 경쟁하면 된다고 만류했습니다. 장재석은 지금도 비시즌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올해도 농구를 배우기 위해 미국에 한 달 일정으로 갔습니다.
박지훈(안양KGC)은 고3 올라갈 때 신장이 170센티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신장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더 노력했습니다. 고3 때부터 대학까지 키가 15센티 가까이 자랐습니다. 키가 크면서 그간의 노력은 더 큰 열매로 돌아왔습니다. 중앙대 코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제자 중 하나입니다.
장재석처럼 도전하고 투자했는지, 박지훈처럼 노력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면 아닌 것 같다고 임 코치는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지금 제자들에게 합니다. 빨리 이해하는 선수가 있고 아닌 선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대화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대화를 포기하는 것은 방치라고 생각합니다.
임성인표 코칭의 핵심 키워드는 ‘소통’입니다. 잘하는 선수들은 받아들이는 것도 잘한다고 합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선수들은 받아들이는 것도 빠르다고 합니다. 대체로 그렇다고 합니다. 선수에 맞는 소통의 방법을 찾는 것은 코치의 역할입니다.
“앞으로 이 선수가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봅니다. 지금은 부족할 수 있어요. 그런데 조금만 잡아주면 대학에서, 프로에서 잘할 선수들이 보여요. 그런 선수들을 키우는 게 가장 큰 보람입니다.”
코칭의 핵심 키워드는 ‘소통’
경복고는 지금 제79회 전국남녀종별농구선수권대회에 참가 중입니다. 이번 대회도 목표는 우승입니다. 예선은 3전 전승으로 가볍게 통과했습니다. 선수들의 사기는 높습니다. 어느 팀을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아직은 멘탈이나 이런 부분들이 부족하죠. 그래도 선수들이 잘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선수들끼리 소통도 잘하고, 관계도 되게 좋더라고요. 우리 팀의 가장 큰 경쟁력입니다.”
졸업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모두 지도자 생활을 해본 것은 흔치 않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모교는 임 코치를 찾았습니다. 선수들의 마음부터 다독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기부여도 필요했습니다. 임 코치의 ‘소통’은 그렇게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너스 원 샷> 임성인이 본 장재석
약간 4차원적인 게 있어요. 되게 순수하고….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도 했죠. 드래프트 나가기 전에 자기는 외국으로 가고 싶다고, 중국 리그에서 큰 선수들과 부딪쳐 보겠다는 거죠. 본인이 부족하니까 더 큰 무대에서 배우겠다는 것입니다.
중국 리그가 우리나라보다 크지 않다고 얘기했죠(웃음). 한국도 외국인 선수들과 부딪치잖아요. 그 선수들과 경쟁하면서 국가대표가 되고, 국제무대에서 큰 선수들과 부딪치는 게 더 좋다고 했어요. 그래도 그 마음이 기특하죠. 항상 배우려는, 겸손한 마음 자세를 갖고 있어요.
얼마 전에 복농회(경복고 농구부 OB모임) 참석하라고 전화를 했는데 미국에 있다고 해요. 시즌 끝나면 자비로 한 달씩 가는 거죠. 노력을 많이 하는 친구입니다. 아주 하이클래스는 아니지만, 꾸준히 잘하고 있어서 대견하기도 합니다.
조원규_칼럼니스트 chowk87@naver.com
#사진_점프볼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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