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 보며 자란 어린 해리스... 실리콘밸리가 그의 코코넛이었다 [찐밸리 이야기]
미국 진보 정치 정체성 확립한 정치적 기반
대선 승리 땐 '실리콘밸리 출신 대통령 1호'
편집자주
내로라하는 기술 대기업이 태동한 '혁신의 상징' 실리콘밸리.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지만 거주민 중 흑인 비율은 2%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화려한 이름에 가려진 실리콘밸리의 다양한 얼굴을 '찐밸리 이야기'에서 만나 보세요.
지난 27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버클리의 사우전드오크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는 아이들에게 자기소개를 하며 "카멀라 해리스를 찾아 왔다"고 말하자 "이쪽으로 오라"고 안내해 줬다. 자신을 벤이라고 소개한 아이는 "다른 사진기자도 며칠 전 여기에 왔었다"며 최근 이 학교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전했다.
"저기에 있어요." 그들이 가리키는 쪽으로 눈을 돌리니 건물 벽면 하나를 가득 메운 벽화가 눈길을 붙잡았다. 다양성을 뜻하는 듯한 형형색색 배경 위에 미국 노동 운동가 돌로레스 우에르타, 파키스탄 출신 여성 교육 운동가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말랄라 유사프자이, 미국의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 세리나 윌리엄스 등 여성 아이콘들이 그려져 있었다. 벽화 한가운데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있었다.
사우전드오크스 초등학교는 해리스 부통령이 졸업한 곳이다. 학교는 해리스 부통령이 연방 상원의원이던 2019년 "훌륭한 리더로 부상한 여성과 유색인종을 아이들이 보고 자라도록 하기 위해" 이 벽화를 제작했다고 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그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벽화 사진을 공유하며 "이렇게 많은 뛰어난 여성들 사이에 포함돼 영광"이라고 남겼다.
지난 한 주 동안 그보다 더 '핫'한 사람이 있었을까. 2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미 민주당 대선 후보직을 사퇴한 이후, '카멀라 해리스'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이름 중 하나가 됐다.
실리콘밸리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리스 캠프는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레이스에서 하차한 이후 48시간 만에 1억 달러(약 1,381억 원), 일주일 만에는 2억 달러(약 2,762억 원)의 후원금을 모금했다. 이러한 폭발력의 이유 중 하나는 "해리스가 캘리포니아 기술 거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미국 CNN은 25일 기사에서 "미국 기술업계가 '홈그라운드 출신 후보'를 내세울 준비를 하고 있다"며 "최고의 테크 리더들이 이미 해리스를 지지하고 기부하는 형태로 그들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전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샌프란시스코와 철교로 이어지는 도시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오클랜드와 인접한 도시 버클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일대에서 거주하며 검사 생활을 한 뒤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모두 넓은 의미에서 실리콘밸리에 속하는 곳으로, 오는 11월 5일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꺾고 그가 승리하면 '역사상 첫 실리콘밸리 출신' 미국 대통령이 된다. 미 테크전문지 와이어드는 "실리콘밸리가 해리스의 코코넛이었다"고 평가했다. 과거 해리스 부통령이 '모든 것은 맥락 안에 존재한다'는 뜻에서 "어머니는 가끔 '너희가 방금 코코넛 나무에서 떨어진 것 같냐'고 말씀하셨다"고 발언한 데 빗댄 것이다.
해리스 고향은 '흑인 인권 운동의 성지'
해리스 부통령은 12세가 되던 해까지 캘리포니아주에 살다가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결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의 '정치적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자서전 등을 통해 회고한 바 있다.
출생지 오클랜드는 미국 진보 정치 중심지로 통하는 캘리포니아에서도 '흑인 인권 확립'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도시다. 1940~70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거 이주해 자리 잡으면서 이 일대에선 흑인 거주 비율이 단연 높은 곳이 됐다. 백인 남성이 주류인 경찰의 폭력에 맞서기 위해 1966년 조직된 흑인 인권 단체 블랙팬서당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1980년 47%로 최고에 달했던 오클랜드의 흑인 인구 비율은 실리콘밸리 일대의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최근 20% 초반까지 하락했으나, 이마저도 실리콘밸리 대표 도시 새너제이(약 3%)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다. 불과 1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샌프란시스코(5%)와도 차이가 크다. 미국 Z세대를 대표하는 배우 젠데이아, 래퍼 MC 해머 등 흑인 유명인사 가운데 상당수가 오클랜드 출신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평가가 많다.
각각 자메이카와 인도 출신인 해리스 부통령의 부모는 오클랜드 거주 시절 가끔 그를 유모차에 태워 시민권 운동 현장에 데려갔다고 한다. 해리스 부통령은 "어머니는 흑인 웨이터를 고용하지 않는 멜스 드라이브인(식당 프랜차이즈)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던 이야기, CORE(인종평등회의)가 미국 남부에서의 인종차별 철폐에 대한 연방정부의 무대응에 항의하기 위해 조직한 시위 등에 대해 들려주곤 했다"고도 말한 적이 있다. 부모와 지역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진보 정치와 가까운 삶을 살게 됐다는 의미로 읽힌다.
해리스 부통령의 가족은 그가 6세 때 버클리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때부터 그는 약 6년 동안 버클리에서 흑인들이 주로 모여 지내던 뱅크로프트가의 한 탁아시설 건물 2층에 살았다. 그 무렵 미국 연방정부는 흑백 학생들의 상호작용을 늘리려는 목적으로 이른바 '학교 통합' 정책을 시작했는데, 버클리는 그에 맞춰 가장 먼저 학교 통합을 시행한 곳 중 하나였다. 이에 따라 해리스 부통령은 7세 때부터 백인 학생들이 주로 거주하던 부촌 '사우전드오크스'로 매일 스쿨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이 정책은 훗날 인종차별 철폐엔 직접적 도움이 되지 않은 정책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이때의 경험이 또 다른 세상에 눈을 뜨는 기회가 됐다고 해리스 부통령은 회상했다. 통합의 힘과 필요성을 깨닫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중·고등학교를, 미국 워싱턴에서 하워드대학교를 각각 졸업한 해리스 부통령은 UC 헤이스팅스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1990년 변호사 자격을 얻은 뒤 캘리포니아 앨러미다카운티 지방검찰청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실리콘밸리를 기반으로 △흑인 여성 최초 샌프란시스코 지방검사 △흑인 최초이자 여성 최초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 겸 검찰총장 △남아시아계 최초 연방 상원의원 등 '최초' 기록을 줄줄이 세웠다.
이 기간 중 실리콘밸리의 엘리트들과도 친분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페이스북 초창기 멤버인 숀 파커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미망인이자 자선사업가인 로렌 파월 잡스와 함께 여러 행사에 등장하는 등 기술계 인사들과 교류를 맺던 현장이 언론에 수차례 포착됐다. 우버 최고법률책임자를 지낸 토니 웨스트는 그의 매제다. 결국 중도 사퇴로 끝난 2020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참여 당시에는 세일즈포스 마크 베니오프 최고경영자(CEO)와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벤처투자자 론 콘웨이 등의 공개 지지를 받았다.
해리스로 결집하는 실리콘밸리
실리콘밸리와의 두터운 인연은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로 부상한 해리스 부통령의 최고 정치 자산이 돼 주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사퇴 이후 오랜 민주당 후원자인 리드 호프먼 링크드인 공동창업자와 콘웨이가 해리스 부통령을 지지하는 정치자금 모금 활동을 개시했고, 넷플릭스 공동창업자인 리드 헤이스팅스도 해리스 부통령의 대선 출마를 지원하는 슈퍼팩에 700만 달러(약 96억 원)를 기부했다. 셰릴 샌드버그 메타 전 최고운영책임자(COO),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 코슬라벤처스의 비노드 코슬라 CEO 등도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사퇴 전까지는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던 실리콘밸리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해리스 부통령을 중심으로 빠르게 결집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민주당 소속 베트남계 시의원(밀피타스)인 앤서니 판은 "많은 젊은이가 이제 투표에 나서야 할 강력한 이유를 갖게 됐다"며 "(그의 대통령 당선은) 더 많은 장벽을 허물 수 있는 길을 열 것"이라고 CBS 인터뷰에서 말했다. 27일 해리스 부통령이 검사 시절 거주했던 오클랜드의 한 아파트 앞에서 만난 타이론 무어는 "이제야 선택지가 생긴 기분"이라며 "트럼프의 당선을 막기 위해서라도 (해리스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해리스 부통령 등판 효과가 실리콘밸리의 중도 표심을 끌어오는 데까지는 미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그가 인공지능이나 가상화폐 등 신기술에 대해 '규제 우선' 정책을 펴 왔던 바이든 대통령 기조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크고, 샌프란시스코 등의 치안 악화에도 일부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자신의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실리콘밸리 벤처투자가 출신 JD 밴스 상원의원을 택한 것도 민주당 몰표를 일부 저지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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