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리도 ‘외국 대리인 등록법’ 생각해 보자
최근 미국 연방 검찰이 한국계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을 기소했다. 연방 검찰은 미국 정부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대리해 일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미국의 ‘외국 대리인 등록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계 안보 전문가가 미국에서 형사 처벌 대상이 됐다는 사실에 충격을 표시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이를 계기로 ‘한국판 외국 대리인 등록법’이 필요하다는 공론이 펼쳐졌으면 한다. 우리 땅에서 외국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의 자유를 주고, 어떤 선을 넘으면 처벌할지에 대해 명확한 경계를 그어 놓는 게 안보를 위해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미 테리가 만약 한국에서 비슷한 행동을 했다면 형사 처벌 단계에 이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외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대리인을 미리 등록하게 하는 법률이 없기 때문이다. 명확한 법률 규정 없어 ‘죄형 법정주의 원칙’상 처벌에 공백이 발생한다는 얘기다. 우리 형법은 당사자가 적국을 위해 간첩 행위를 한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형법 제98조의 ‘간첩죄’로 처벌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외국 정부와 단체를 위한 활동을 하려면 ‘외국 대리인 등록법’에서 규정한 대로 미리 법무부에 외국 대리인 등록을 해야 한다. 이 법에도 불구하고 외국에 의한 다양한 로비가 계속되자 지난해 공화당 중진인 존 코닌 상원 의원이 ‘적대적 영향과 허위 정보 및 불투명한 해외 금융 방지 법안’을 발의했다. 이는 현행 ‘외국 대리인 등록법’을 개정해 미국 내에서 외국 정부나 정당, 회사, 개인 등의 이익을 대변하는 활동을 하는 개인 혹은 단체의 등록에 관한 규정을 보다 구체화하는 내용이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해 국민의힘 최재형 의원이 ‘외국 대리인 등록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국회 회기 종료로 폐기됐다. 이런 논의를 중단하지 말고 미국에서 수미 테리가 기소된 것을 계기로 우리도 22대 국회에서 재논의해서 조속한 입법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 외국 대리인을 등록하게 한다면 물밑에서 로비를 벌이지 않고 공개적이고 건전한 활동을 유도할 수 있다. 또한 외국을 위한 활동이 보다 투명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외국을 위한 활동 가운데 합법과 범법의 구분이 좀 더 명확해지는 효과도 얻을 수 있어 안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안보 수위를 높이기 위해 ‘간첩죄’도 시대 변화에 맞게 개정할 필요가 있다. 간첩죄를 명시한 형법 제98조는 적국을 위해 간첩 행위를 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자를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군사상의 기밀을 적국에 누설한 자를 역시 같은 형으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이 조항은 간첩 행위가 적국을 위해 행해진 경우에만 처벌하고 우방국 또는 적국이 아닌 국가·단체를 위해 행해진 경우에는 처벌하지 못하는 입법적 흠결이 있다.
이처럼 좁은 간첩죄 처벌 범위는 지금과 같이 적과 우방이 따로 없이 정보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는 냉엄한 국제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형법 98조도 미국, 독일, 일본처럼 간첩 행위의 대상을 확대해서 북한에 이로운 기밀 누설뿐 아니라 다른 국가·단체를 위해 간첩 행위를 한 경우도 처벌이 가능하도록 개정해야 한다. 우리를 향한 정보 활동의 주체가 반드시 적국에 한정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선진국들은 외국의 침략에 대비해 국가 안보와 민주주의를 지킴으로써 국민의 생명·재산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규정을 헌법에 두고 있다. 우리가 안보 수준을 더 높게 유지하려면 ‘외국 대리인 등록법’을 하루빨리 제정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우방에 의한 정보 침탈 행위를 막기 어려운 낡은 ‘간첩죄’를 개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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