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핵옵션 더 이상 금기 아니다[윤상호 군사전문기자의 국방이야기]
하나는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시도다. 1970년대 미국과의 동맹에 믿음을 잃어가던 박정희 정권에 지미 카터 미 행정부의 주한미군 철수 추진은 국가 생존이 걸린 비상사태였다. 미국이 한국을 내팽개칠 것이라는 위기감은 비밀 핵개발의 촉매가 됐다. 미국의 만류와 압박, 박 대통령의 서거로 핵개발은 미완으로 일단락됐다.
또 하나는 2000년 한국원자력연구소의 우라늄 농축 실험이다. 당시 미국 등 핵강국만이 가능했던 레이저 농축법으로 천연 우라늄을 77%까지 농축하는 데 성공한 것. 뒤늦게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국제적 파장이 일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6차례나 사찰을 나왔다. 과학적 호기심의 단순 실험이라고 해명하고, 모든 자료를 IAEA에 신고한 점이 참작돼 제재와 처벌은 피했다.
하지만 미국의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는 더 날카로워졌다.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핵보유국으로 직행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미국이 대북 ‘핵우산’ 공약을 강화한 데는 한국이 핵개발을 단념토록 하겠다는 역설적 배경이 근간에 자리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미국 내에선 한국이 핵을 갖게 되면 일본과 대만 등으로 ‘핵도미노’가 이어져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붕괴될 것이란 우려가 강하다. 어떠한 동맹·우방국도 ‘핵클럽’ 추가 가입을 허용할 수 없는 이유다. 이 같은 기조에선 한국에 어떤 핵옵션도 금기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북한의 핵이 NPT 체제의 최대 도전으로 부상한 게 작금의 현실이다. 북한의 핵무력은 한국을 초토화하고, 미 본토까지 때릴 수 있을 만큼 고도화됐고, 지금 이 순간도 질적 양적 증강이 진행 중이다. 북-러 군사 밀착을 계기로 러시아의 핵·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기술까지 북한에 넘어가면 NPT 체제는 와해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는 우려도 고조되고 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정부 고위 소식통은 “최소한의 잠재적 핵역량이라도 서둘러 갖춰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1992년 미국의 전술핵 철수와 북한의 핵 포기 약속을 맞바꾼 한반도 비핵화선언의 무효 선언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선언은 북한의 핵위협이 ‘레드라인(금지선)’에 근접했음에도 한국의 핵옵션에 족쇄를 채운 ‘불평등 선언’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근 한미 조야에서 한국의 대북 핵옵션이 연이어 공론화되는 것도 북한의 핵폭주를 더는 용인해선 안 된다는 위기감의 발로일 것이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부장관은 지난달 미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외교협회(CFR) 행사에서 “러시아와 북한의 행동이 역내 국가들이 자국의 모든 군사 및 기타 조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한국의 핵무장론이 커지고 있다는 전문가 진단에 힘이 실리는 것으로 해석됐다.
한미 정부는 워싱턴선언 이후 핵협의그룹(NCG) 창설과 다음 달 연합연습에서 북한 핵공격을 상정한 첫 핵작전 연습 등을 통해 일체형 확장억제로 대응한다는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핵주먹’은 가깝고 ,미국의 ‘핵우산’은 멀게 느껴지는 게 현실이다.
북한의 핵위협이 마지노선을 넘는 사태를 상정해 전술핵 재배치를 비롯한 다양한 핵옵션을 강구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그 일환으로 한미가 북한과 주변국에 비핵화 협상 시한을 통보한 뒤 북한이 끝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한반도와 그 주변에 전술핵을 배치하는 조건부 한시적 재배치 방안 등이 거론된다.
한미 정상이 이달 중순 승인한 ‘한반도 핵억제·핵작전 공동지침’을 바탕으로 미국의 핵전력이 포함된 핵연합작전계획을 마련하고, 북한의 핵공격 시 저위력핵탄두 사용 선언 등과 같은 획기적 결단도 검토 가능한 핵옵션이다.
아울러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 사용에 대비해 핵무기 대응과 봉쇄에 관한 훈련을 한국 부대에 제공함으로써 한국군이 북한의 핵공격에 실시간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대북 핵옵션을 통해 미국의 확장억제에도 아랑곳없이 핵무력 증강에 골몰하는 북한에 판이 바뀌었음을 주지시켜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에도 북한의 핵 고도화를 지금처럼 방치하면 결국 두 나라의 평화와 안정이 위협받고, 역내 핵확산이 초래될 수밖에 없다는 엄중한 경고가 될 것이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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