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오물풍선이 보여준 북한의 속성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2024. 7. 29.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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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대남 오물풍선을 살포한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앞에서 군 장병들이 내용물을 처리하고 있다. 뉴스1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북한의 오물풍선이 24일 용산 대통령실 구내에서 발견됐다는 뉴스를 보자마자 김정은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지금까지 11차례에 걸쳐 보낸 수천 개의 오물풍선들은 북한이 보냈다고 말하기보다 김정은이 보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북한에서 김정은의 지시 없이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우선 타깃이었던 용산 대통령실에 오물풍선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김정은은 얼마나 기뻤을까. 국가대항전 축구경기에서 역전골을 넣은 선수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를 내지르진 않았을까.

오물풍선을 날리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실무자들은 김정은으로부터 포상을 받았을 것이다. 북한은 돈이 없으니 상금보다는 훈장이나 승진, 입당과 같은 명예 위주의 포상을 한다.

지난 두 달간 오물풍선에 천착한 김정은을 보고, 북한의 변할 수 없는 속성을 새삼 느끼게 됐다. 오물풍선은 북한 사람들이 태어나서부터 본능적으로 체득한 생존의 본능이 김정은까지 삼켜버렸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다.

북한에서 생존하려면 반드시 이것 하나는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극단적인 충성심이 나를 지킨다”는 것이다.

당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고 하면 어떤 과격한 행동도 처벌받을 일이 거의 없다. 반면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하면 우유부단한 자로 찍혀 처벌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특히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는 자는 충성심이 부족한 자로 여겨질 뿐이다.

살아남기 위해선 김정은의 지시라도 잘 새겨들어야 한다. 예컨대, 김정은은 집권 직후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라는 말을 시대구호처럼 내세웠다. 혹시 이를 진심인 줄 알고 세계를 쳐다봤다면 그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 북한은 김정은의 말과는 반대로 국경을 물샐틈없이 폐쇄하고 외국의 것을 봤다고 ‘반동사상배격법’으로 닥치는 대로 처벌하고 있다.

김정은은 집권 이래 북한 간부들에게 ‘인민의 심부름꾼’이 될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2년 전에도 당 대회에서 “인민의 당, 심부름꾼당, 이것이 우리 당의 유일한 존재 명분이고 최고의 징표이며 영원한 본태”라고 연설까지 했다. “궂은일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자기의 뼈와 살을 깎아서라도 인민들의 편리와 생활을 최대한 도모하는 것이 오늘 우리 당이 바라는 당 비서들의 기본자세”라고 부르짖었다.

만약 이 말을 곧이 듣고 인민의 심부름꾼이 되겠다고 생각한 당 비서가 있다면 그는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신 차릴 틈이 없이 하달되는 삼지연 건설, 평양 주택 건설, 원산갈마관광단지 건설, 지방공장 건설 등에 자재와 인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낼 수 있는 간부가 김정은이 바라는 당 일꾼이다.

한밤중에 비상소집을 해 ‘러시아에 보낼 포탄상자를 24시간 안에 각자 두 개씩 바치라’는 지시를 완수하는 사람이라야 충성심이 높은 당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인민의 심부름꾼이 아니라 인민을 악착스럽게 쥐어짜는 김정은의 심부름꾼이 돼야만 간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김정은이 집권하자마자 김일성광장에서 내뱉은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겠다”는 약속을 진심이라고 믿었다면 그 역시 간부 자격에선 미달이다. 숱한 사람이 굶주려도 김정은이 나타나면 “우리 관내 인민은 장군님 덕분에 허리띠를 풀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출세할 자격이 있다.

김씨 일가가 3대째 집권하고 있는 북한에 이제 양심을 갖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간부는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직 극단적 과격분자와 아첨꾼들만 득실댈 뿐이다. 이제 이들은 김정은 주변에서 충성심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과격한 주문을 속삭일 것이다.

“풍선보단 드론을 서울 한복판에 박아버립시다.” “적의 확성기들을 포사격으로 몽땅 날려버립시다.” “삐라 보내는 한국 반동들을 처단합시다.”

온건파가 사라진 북한은 끊임없는 과격한 행위로 존재를 인정받으려 했던 극단적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처럼 변해가고 있다. 그 수장은 인민의 안위는 머리에서 지운 채 오물풍선 지휘에 열중하고 있다. 김정은이 주변을 둘러싼 과격분자들의 충성심에 감동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결심했다면, 오물풍선에 이어 또 뭐가 날아올지 알 수 없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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