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의 풀뿌리]무엇이 악성민원을 만드나
얼마 전 많은 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인명피해가 났다. 한 남성이 집 주변을 살피러 나갔다가 옹벽이 무너지며 쏟아지는 토사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그 사고가 난 날에도, 그 이튿날에도 행정안전부, 산림청, 한국수자원공사, 충북도청, 군청 등에서 수십건의 문자가 새벽에 쏟아졌지만 쓸모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천변, 급경사지, 산과 인접한 주택 등은 위험하니 접근하지 말고 대피하라는데, 한밤중이나 새벽에 문자를 받고 어디로, 어떻게, 그리고 얼마 동안이나 대피하라는 걸까? 비슷하게 반복되는 메시지를 받고 알아서 대응할 시민들은 몇이나 될까?
행정과 기업, 시민이 함께 쌓는 신뢰
우리집도 산 밑에 있어 집 뒤에 옹벽이 있고 다른 집들도 비슷한 처지다. 산사태 위험이 높다는 문자가 오면 겁이 덜컥 나는데, 군청에 전화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지금 전 인원이 사고현장에 나가 수습 중이라 여력이 없다, 산림청이나 다른 곳에 물어보시라, 사고가 나지 않았으니 군청이 당장 도와드릴 것이 없다, 십중팔구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이다. 답답해서 비가 많이 내리는 날마다 전화를 했다면 나는 악성민원인으로 등극할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정보 전달과 무책임한 대응, 답답한 민원의 반복, 날카로운 감정싸움, 이 악순환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문득 2023년 5월 참관한 군산시 화학물질안전관리소위원회의 풍경이 떠올랐다. 군산시에서 화학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주민들의 불안이 끊이지 않자 행정과 기업, 시민단체가 함께 참여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참관한 날의 논의 안건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주민들에게 알릴 방법과 그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화학사고의 규모와 사고물질, 사업장 외부에 미칠 영향에 따라 방법과 내용을 달리하는 주민알림지표가 토의 주제였다. 참가자들은 문자만이 아니라 전화로 직접 통보할 사람과 조직, 그리고 무조건 전체 시민에게 문자를 뿌릴 게 아니라 사고 유형에 따라 범위를 달리하는 것에 대해 토론하며 지표를 더 개선시켰다.
사고가 나지 않으면 가장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고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주민들의 불안을 줄일 수 있는 방법들이 함께 논의되니 서로 간 신뢰가 형성된다. 심지어 이 회의가 열린 장소는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기업이었고, 회의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공장의 안전시설과 장비들을 직접 둘러보며 의견을 나눴다.
담당 공무원은 관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자주 의논하며 위원회를 준비해 신뢰를 받았다. 기업은 화학물질을 은폐하는 악의 집단이라는 이미지에서, 시민단체는 대안 없이 민원만 제기하는 집단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업무 과중과 악성민원의 교차점
지난 몇년 동안 공무원의 휴직률과 퇴직률이 높아지면서 그 원인을 분석하는 언론 기사나 유튜브 기획이 자주 나왔다. 낮은 임금, 과도한 업무, 경직된 조직문화 등 여러 원인이 있지만 어김없이 등장하는 원인은 악성민원이다.
정말 악의적으로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공무원들이 악성민원이라 말하는 것 중 상당수는 정보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거나 사안의 처리 과정과 권한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수십억, 수백억원의 예산을 낭비하고 잘못된 행정조치로 주민들의 안전과 권리를 위협하고 응당 공개해야 할 정보를 온갖 이유를 대며 감추는 사례는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전국적으로 수백건이나 된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악성이라 규정하는 건 바로잡아야 할 문제들까지 은폐시킬 위험이 크다.
그런데도 지금 정부는 악성민원을 잡겠다며 과도한 정보공개 청구를 제한하는 정보공개법 개정을 논의하고 있다. 지금 법에도 반복적으로 정보공개를 청구하는 경우 사안을 종결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음에도 행정의 자의적 판단을 더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제 곧 가을 태풍의 계절이다. 행정이 모든 위험지대를 파악하고 대처하는 건 불가능하고, 주민들과 함께 새로운 재난에 대응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우리가 어떤 위험에 처해 있고 역할을 어떻게 분담해야 하는지 정보를 공유하고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 그러면 양성(良性)민원이 늘어나고 행정의 업무도 줄어드는 선순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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