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철의 알고 싶은 정치]정말로 보수정치를 대표하겠다면

기자 2024. 7. 29. 20:3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동훈호가
보수 살리기 우선 기치로
내걸어야 하는 것은
보수의 가치와 규범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이때 특히 중요한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강조와 유도이다
변화를 추동하든 거부하든
독단-독선-독주 태도가
비(非)나 반(反) 보수임을
잊어선 안 된다
따라서 보수정치는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사회적 토론과 합의 통해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한동훈호’가 출범했다. 국민의힘이 총선 대패 후 석 달이 지나 ‘겨우’ 내린 처방책이다. 과연 이 처방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총선 패배 후 ‘최후의 골든타임’에 놓여있다는 소리까지 듣고 있는 보수정치의 대표 국민의힘 혹은 국민의힘이 대표하는 보수정치를 살려낼 수 있을까?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전히 친윤석열계 vs 반윤석열계 구도 속에 머물러 힘겨루기를 하느라, 보수정당의 이념·정책 노선을 둘러싼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장 정책위의장 인선 문제를 둘러싸고 벌이는 논란만 봐도 그렇다. 당면 정책 과제의 우선순위 설정이 아닌, 누구의 사람이냐를 두고 힘 겨루기를 하고 있다. 그 와중에 당대표의 인사권마저 부정당하고 있다.

한동훈 대표가 이런 상황을 잘 극복하고 국민의힘과 보수정치를 살려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특히 경험과 역량의 측면에서 그렇다. 그럼 적어도 의지는 갖고 있을까? 아마도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니 총선 패배 책임이 있으니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표 경선에 나섰고, 결국 선출되지 않았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당선’은 시작일 뿐이고, 중요한 건 당선 이후에 그 의지를 실제로 어떻게 발현해가느냐에 있다. 채 상병 특검과 김건희 여사 특검같이 여야가 시비를 벌이고 있는 현안들에 매몰되거나, 총선 때처럼 경쟁자를 범죄집단으로 몰아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에 치중해서는 ‘보수 살림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자처할 수 없다. 그런 건 다툼의 의지 표명에 불과하다.

보수 살림의 의지를 인정받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적으로 요구받는 보수정치의 위상과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하고도 깊고 넓은 사유가 있어야 하고, 그 위상과 역할을 충족하고 수행하기 위한 실천 과제를 선정하고 제시해야 한다. 한국에서 그간 보수정치에 대한 의식적 사유가 부재했거나 미약했음을 감안할 때, 그래서 그저 기득권 수구 꼴통 세력으로 치부되어왔음을 떠올릴 때, 또 경쟁세력인 진보정치의 흠결과 실책을 헤집고 공격하는 반사이익만 노려왔음을 볼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러니까 보수정치의 역사와 현재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인식과 태도를 채비하는 데에서 보수살림의 의지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삼-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유산과 윤석열 정권의 오류와 한계를 잘 살피고, 그것을 바꿔낼 비전과 전략을 모색하는 자세를 선보여야 하는 것이다.

보수정치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사유에서 우선 짚어봐야 하는 것은 그간 한국에서 보수정치가 ‘무이념의 이념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보수정치는 민주화 이전의 질서와 사유 방식, 즉 분단체제와 반공주의 그리고 민중배제적 성장주의를 제외하면, 민주화 이후 사회를 통합하고 이끌어갈 지향 가치와 행동 규범과 전략의 창출을 선도하지 못했다. 시대변화에 조응해 새롭게 지켜내야 할 것을 추려내지 못했던 것이다.

‘긍정적 요소’는 다시 불러내야

가령 김영삼 정권은 전두환·노태우 신군부독재세력을 통치주도세력에서 축출했으나, 개발독재시대의 신화에 기대어 거대 독점자본과 시장의 요구에 주로 부응했다. 그러면서 평등과 분배와 노동 약자 보호와 권익신장 같은 민주화 이후의 시대에 걸맞은 가치와 규범을 지켜내지 못했다. 저성장과 불평등 심화의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보수정치였던 것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 해고와 손해배상청구,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등으로 얼룩진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도 이러한 기조는 유지되었다. 심지어 사익 추구를 위한 권력의 사유화 경향을 드러내면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해야 했고,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마저 겪어야 했다. 그저 옛날의 성장 신화를 반복하며 부동산·금융 자산 증식의 욕망을 부추겼고, 불평등을 당연시하고 정당화하거나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데에 그쳤을 따름이다.

이를 감안할 때, 한동훈호가 우선 기치로 내걸어야 하는 것은 시대에 부합하지 않은 것을 지키려고 했던 데에서 탈피하며 보수의 가치와 규범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다. 이때 특히 중요한 것은 변화와 개혁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기득권층의 자기 희생과 양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강조와 유도이다.

현대정치에서 보수는 시대적 격변의 상황에서 자기 희생과 양보를 통해 존재의 의의를 입증함으로써 지속될 수 있었다. 소수특권계급 지배의 정치에서 대중민주주의로의 전환, 봉건적 토지기반의 경제에서 상공업 중심 경제로의 전환, 친자본적 자유방임국가에서 사회복지국가로의 전환 등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러했다. 통제할 수 없는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화를 피하기 위해 자기희생과 양보는 필수 전략이다. 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 혁명 혹은 전쟁에 처하거나, 극우 혹은 극좌 세력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체제위기를 겪어야 한다.

보수정치에 대한 사유 과정에서 다시 불러내야 할 것도 있다. 당내 파벌 경쟁과 지지 동원의 편의성에 갇혀 사장되고 있는 한국 보수정치의 ‘긍정적 요소’에 관한 것이다. 성공하는 보수로 ‘갈 뻔했던’ 경험과 자원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한국의 보수정치를 그럴 듯하고 품격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아무리 레토릭 차원 혹은 변형적 정책의 도입에 그쳤다고 해도 그렇다.

이명박 정권 시기의 녹색성장론과 공정사회론, 박근혜 정권 때의 경제민주화론(수용)과 노동존중 선거 캠페인 전략의 구사 경험, 유승민 전 의원의 공정한 고통분담과 중부담·중복지론 주창 등이 그것이다. 김무성 전 의원의 사회적 합의 강조론도 있다. 이들 담론에는 시대 상황의 정의, 추구해야 할 가치와 규범, 그리고 전략적 방도 등이 담겨 있다. 여기에 주목해 보수의 위상과 역할, 즉 정체성을 새롭고 탄탄하게 확립할 수 있다. 또 보수정치의 새 비전도 세울 수 있다.

2022년 대통령 선거 때처럼 기껏 한다는 게, 사회적 갈등을 심화하는 세대와 젠더 균열의 조장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해서는 보수를 제대로 세울 수 없다. 보수는 기본적으로 균열을 메꾸고 갈등을 완화하며 통합과 안정과 질서를 유지·구현해야만 진보와 차별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호의와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지난 대선에서 0.73%의 근소한 격차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된 것은 세대와 젠더 갈등·동원 전략의 성공이 아니라, 차라리 갈등을 조장·심화시켜 사회적 안정을 해친 것에 대한 경고였다(최근 이준석 의원은 세대와 젠더 갈등·동원에 소극적인 것 같은데, 아마도 그러한 경고의 의미를 포착했기 때문이리라).

현 상황서 토론과 합의는 더욱 중요

윤석열 정권이 출범 이후 내내 낮은 국정지지율에 시달리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러한 보수의 핵심 정체성과 그것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는 대통령과 그 측근 세력의 인식 부족, 그에 더한 태도의 무도함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이 지면에서 언급할 마지막 유의 지점이 나온다. 변화를 추동하든 거부하든 ‘대놓고 자기 마음대로만 하는’ 독단-독선-독주의 태도가 비(非) 혹은 반(反) 보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수정치 존립의 기본 전제는 ‘인간 이성의 오류 가능성’이다. 그래서 (진보처럼) 이성과 진리라는 이름으로 자기 옳음을 강변하고 관철시키기보다, 기성 질서와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상호양해와 합의의 도출을 중시한다. 시대변화에 따라 새로움을 거부할 수 없으면 오히려 주도하고 나서서 ‘안정 속 개혁’으로 지연·변형시키려고 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보수정치는 시간이 다소 더 걸리더라도 사회적 토론과 합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자기 정책을 지지하는 특정 층만의 과격하고도 집약적인 동원에 기대어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하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그러한 규범에 정확히 어긋난다. 친보수 주도의 매스미디어와 검경 등의 공안 권력 동원에 의존하는 밀어붙이기 방식에 집착한다.

4차 산업혁명과 기후재앙, 국제정치의 군사화, 고용 및 소득의 불안정과 불평등 심화 등과 같은 거대 변동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회적 토론과 합의가 한층 더 중요하다. 경험하지 못한 삶의 현실에서 더 커질 불안감과 더욱더 첨예해질 생각과 처지의 차이가 사회구성원들 간의 소모적인 다툼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급박한 만큼 토론과 합의를 위한 치밀한 사전 준비와 정교한 기술에 대한 고민도 절실하다.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의제와 담론과 정책을 안정적으로 구성하고, 그것을 기동력 있게 전파할 제도적 단위의 구축은 필수적이다.

한동훈 대표와 국민의힘이 진정 한국의 보수정치를 대표하겠다면,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그 의지를 천명하고 인정받겠다고 한다면 필히 살펴야 할 일들이다. 친윤계냐, 반윤계냐 같은 조잡한 시비에 갇혀있기에는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나 심상치 않아 더욱 그렇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