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활과 한국인

김태훈 논설위원 2024. 7. 2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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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활이 등장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은 한국에 있다. 울산시 울주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다. 한민족은 신석기 시대, 늦어도 청동기 시대 초기에 이미 활을 쐈다는 의미다. 세계적으로 활 잘 쏘는 나라의 원조로 꼽히는 나라가 서기 2~3세기 중동의 지배자였던 파르티아다. 말 타고 달리며 후방을 향해 활을 쏘는 게 ‘파르티아 사법’이다. 이런 고난도 궁술은 동쪽으로 전해졌는데 우리도 이를 썼다는 사실이 5세기 고구려 고분 무용총에 그려진 수렵도로 밝혀졌다.

▶고구려 건국 설화인 동명왕 이야기에 ‘주몽이 7세부터 손수 활을 만들었고 살을 날리면 백발백중이었다’고 돼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신궁(神弓)으로 불렸다. 고려 말 황산대첩에서 왜구 대장의 투구 꼭지를 활로 쏘아 맞혔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위화도 회군 당시 군사를 돌리는 명분으로 내세웠던 ‘4불가론’에도 활이 등장한다. ‘지금은 장마철이어서 활을 붙이는 접착제인 아교가 풀릴 수 있다’고 했다. 활은 서양인들도 사랑하는 무기였다. 아폴론, 헤라클레스, 아르테미스 등 고대 신화의 주인공은 명궁이기도 했다.

▶서양은 방아쇠를 당겨 쏘는 기계식 활인 석궁이 대세를 이뤄갔다. 스위스 설화에 등장하는 명궁 빌헬름 텔의 무기도 석궁이었다. 살상력이 커서 12세기 교황 이노센트 2세는 “기독교도 간 전쟁에 석궁을 쓰지 말라”고 했다. 오늘날로 치면 대량 살상 무기 취급한 것이다. 우리의 활은 나무로 만든 목궁이나 나무를 여러 겹 덧댄 뒤 무소 뿔로 연결해 장력을 강화한 각궁(角弓)을 썼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 등장하는 편전은 짧은 특수 화살을 쓴다. 오늘날의 총열에 해당하는 ‘통아’에 넣어 쏘면 살상력이 더 커졌다. 근거리에선 철 갑옷을 뚫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의 신무기였다.

▶대한민국이 내세울 것 없던 시절, 활은 국민적 자긍심이 되어 주었다. 1979년 양궁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소녀 궁사 김진호가 금메달 다섯 개를 목에 걸고 돌아오자 온 나라가 들썩였다. 그것은 단지 시작이었다.

▶한국 여자 양궁이 올림픽 단체전 10연패를 달성했다. 올림픽 한 종목에서 한 나라가 한 스포츠를 40년 지배한다는 것은 ‘위업’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신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초인적”이라고 했다. 이번에 결승에서 한국 선수들은 최종적으로 단 1점을 앞섰다. 그러나 그 1점에 우리 민족과 활의 수천년 인연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이 아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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