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돈벌이 무대였던 교실…‘배울 기회’마저 빼앗아갔다

신심범 기자 2024. 7. 29.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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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수용 디아스포라 <5> 교실 인형극- 착취 경제


(사진설명 : 김기현 씨가 보관 중인 1967년 부산 장림국민학교 제1회 졸업식 사진. 우측 맨뒷줄의 키가 크고 비교적 머리가 긴 남자 아이가 김 씨다. 부산 사하구가 발행한 ‘사하지’에 따르면 원래 장림국민학교에는 장림동 주민의 학생과 더불어 영화숙에 수용된 적령기 아동과 음성나환자촌 ‘성화원’의 어린이가 함께 다니는 것으로 예정됐다. 그러나 주민 반발로 영화숙 아동은 시설 내부의 교실에서 파견 교사의 수업을 받는 것으로 조정됐다. )

- 영화숙·형제복지원 등 수용시설
- 교실 갖추고 인근 학교 보내기도
- 실상은 구호단체 후원 노린 연극
- “전시용 쇼… 배움 안중에도 없어”

- 해외단체에 모금편지 쓰게 하고
- 원생들 동원해 후원용 공연까지
- 억대 후원금으로 시설 배만 불려

- 어른 되고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 글 모르고 학력 모자라 한계 절감
- “못 배웠다는 설움, 인생의 큰 한”

빛 바랜 흑백사진 속의 1967년 부산 장림국민학교 교정. 왼쪽 가슴마다 흰색 꽃리본을 단 짧은 머리 어린이들이 줄 지어 대열을 맞췄다. 뿌듯한 듯 긴장한 눈동자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학생들 뒤로 ‘축, 제1회 졸업식’이라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그 해 2월 7일 이날, 장림국민학교는 개교 이래 첫 졸업생 96명을 배출했다. 교가대로라면 아이들은 ‘태백산 정기 받은 아늑한 마을’에서 ‘양양한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한글이며 산수를 뗐을 터다. 거기다 이곳은 장림동의 1호 국민학교였다. 동네 사람들에겐 새싹처럼 돋아나는 내 새끼의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같은 공간에 자리했음에도 기쁨을 함께하지 못했다. 그 중 한 명인 김기현(72) 씨는 이날 졸업식이 “전시용이었다”고 단언했다. ‘1기 졸업생’인 그는 당시가 연극처럼 느껴졌다. 공무원이나 구호단체들에게 보여주는 ‘쇼’에 팔려온 날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는 사진 우측 상단의 열다섯 무렵 자신을 가리키며 당시를 곱씹었다.

그는 장림동의 부랑아 수용시설 ‘영화숙’ 원생이었다. 아늑한 마을을 바라보기는커녕 회백색 수용방에 갇혀 파견 교사의 수업을 들었다. 그마저도 간헐적·형식적이라 알아듣기 어려웠다. 김 씨는 “가본 적 없는 학교에서 영화숙 친구 네댓과 사진만 찍었다. 수용시설엔 교실은 있어도 교육은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김 씨는 삼형제가 모두 수용시설에 갇혔다. 어릴 때 이름은 국일·남일·삼일로 두 살 터울들이다. 장남인 김 씨가 ‘국일’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서울 돈암동에서 살던 삼형제는 김 씨가 9살일 때인 1960년 동네 통장 손에 끌려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보내졌다. 이듬해인 1961년에는 영화숙으로 형제 모두 옮겨졌다. 엄마 고향이 영도구 영선동이라 부산으로 보내졌다고 생각했다. 삼형제는 그곳에서 지낸 10년가량 돈벌이에 투입됐다. 구호단체를 상대로 동정심을 호소해 모금했다. 시설의 착취이자 ‘빈곤 포르노’였다.

▮구호단체 돈 노린 ‘교실 인형극’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해외 구호물자. ‘사진으로 보는 광복 60년사’


세간의 인식과 달리 당대 집단수용시설 중엔 교실을 갖춘 곳이 더러 있었다. 교실이 없을 땐 인근 학교로 등교시키기도 했다. 부산의 첫 공식 부랑아 시설인 영화숙에는 1962년 3개 학급으로 구성된 공민학교가 설치됐다. 장림국민학교가 생긴 1966년부터는 이 학교 교사 3명이 영화숙으로 파견 왔다. 1968년에는 성인 부랑자 시설 ‘재생원’에 직업보도교실도 들어섰다. 부산지역 최대규모의 수용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에는 1984년 개금국민학교 분교가 시설 내에 세워졌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는 인근 은평국민학교 등으로 아이를 보냈다.

그 시절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고아가 적지 않았다. 1968년 4월 기준 부산 아동복리시설 81곳에서 생활하는 아동은 9475명이다. 학교에 다닐 때가 된 원생은 7420명이었는데, 581명이 미취학 상태였다. 사정이 이러니 자체 교실까지 갖춘 시설은 칭송의 대상이었다.

실상 교실은 돈벌이를 위한 ‘무대’에 가까웠다. 원생은 교실처럼 꾸며진 무대에서 학생으로 분장된 꼭두각시와 다르지 않았다. 극의 관람객은 현금과 물품을 기부하는 외원단체 활동가, 그리고 시설에 보조비를 지급하는 부산시의 공무원이었다. 시설은 원생들을 앞세워 한 편의 쇼를 벌인 뒤 ‘공연비’를 챙기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호주머니를 두둑이 할 생각뿐이었다. 진정한 배움은 안중에 없었다.

교실은 도저히 수업을 진행할 환경이 못 됐다. 수용 규모에 견줘 교실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영화숙에 처음 공민학교 3개 학급이 만들어질 때 원생 수는 454명에 이르렀다. 수업을 들을 기회도 선별된 소수에게만 돌아갔다. 300명 이상이 아동소대에 수용됐던 형제복지원도 개금분교에 보낸 ‘학생’은 매해 40명 수준에 그쳤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역시 1500명 넘는 원생 중 60~70명만이 근처 초중고로 등교했다.

질도 형편없었다. 원생들의 연령별 학습 수준이 고려되지 않은 것은 물론, 교사들부터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공부에 필요한 노트나 연필 같은 학습도구 역시 구호단체의 자선에 의존했던 터라 늘 모자랐다. 책걸상조차 없어 땅바닥에 앉거나 나무상자를 의자 삼아 썼다. 김 씨는 “공부 가르쳐주는 게 형식적이었다. 그냥 시간만 떼우다 갔다”며 “애초 외부 원조단체들에게 더 많은 후원을 받을 목적으로 교실이 생겼다. 교회도 있었는데, 이 역시 교인 원조를 받으려 지어졌다”고 증언했다.

▮구경 한 번 못 해본 달러 후원금

원생들은 시설의 강요로 영연방아동구호재단, 케어 같은 해외 구호단체에 편지를 쓰기도 했다. 후원자에게 편지를 보내면 답신을 통해 기금이 들어오는 식이다. 김 씨는 “우리들은 옆에서 불러주는 대로 서류를 써서 영연방아동구호재단에 들었는데, 5달러나 10달러가 들어왔다. 또 영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추석 명절 정도 되는 날에는 특별 보너스로 장난감 주머니를 주기도 했다”며 “우리는 그 내용물을 확인만 하고 간부들에게 도로 줘야 됐다. 욕 먹어가며, 맞아가며 시키는 대로 했지만 달러는 구경도 못 해봤다”고 설명했다.

김 씨 삼형제는 북미의 아동 후원단체 ‘양친회’(Foster Parents Plan)에도 가입돼 똑같은 일을 강요당했다. 양친회는 당대 세계 최대의 구호단체였다. 1971년 5월 2일 발행된 가톨릭신문에는 당시 영화숙이 양친회를 상대로 벌인 사기가 짤막하게 소개됐다. 신문은 피해자들의 주장을 빌려 ‘63년도부터 68년까지 영화숙 아동들 중 김국일, 남일, 삼일 등 삼형제 외 60명을 양친회에 가입시켜 3인당 6000원 내지 8000원을 3개월에 한 번씩 받아 모두 착취해왔다’고 썼다. 재판에 넘겨진 영화숙 이순영 원장은 최종적으로 30만 원의 벌금만을 물었다.

‘모금용 쇼’는 영화숙의 후신 격인 형제복지원에서도 자행됐다. 형제복지원은 남구 용당동 ‘형제육아원’ 시절 인근의 용당초 등으로 원생 일부를 보냈다. 시설 홍보용이었다. 1980년대 이후엔 ‘비둘기 합주단’이란 악대를 꾸려 외부 후원들을 위한 공연을 선보였다. 후원자에게 편지쓰기, 연말 그림카드 만들기에도 대거 동원돼 후원금이며 물품을 끌어 모아 착복했다.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 당시 이뤄진 수사에서 최초 횡령액은 11억 원대로 조사됐다가 재판 과정에서 4억4000만 원으로 줄었다.

집단수용시설에서 배움의 터는 돈벌이용 연극 공간으로 전락했다. 아이들이 굶지 않고 학습하는 데 써 달라며 건네진 호의는 시설의 배를 채우는 데 돌아갔다. 어릴 적 시설로 붙잡혀온 피해자들은 글자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세상에 내던져졌다. 그러니 공부가 한으로 남는다. 배워야 할 나이에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괴감을 떨치기 어렵다. 지금 이 시간의 현실을 살아가며 겪는 핍박과 고충은 그 시절 수용시설에서 빼앗긴 ‘배울 기회’, 교육부재에 기원한다고 느낀다.

▮‘못 배웠다’는 서러움과 울분

한국리빙스톤교회가 형제복지원을 찾았을 당시 선교사 측을 맞이한 ‘형제원 비둘기 합주단’. 형제복지원사건피해자실태조사보고서


못 배웠다는 서러움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최영수(64) 씨를 울분에 빠트린다. 그는 공부가 무섭다. 글자를 몰라 수업을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낭패감이 떠올라 괴롭다. 이력서를 작성하지 못해 친구 손을 빌려야 했다. 회사에 다닐 때 남이 불러주는 말을 받아 적지 못해 진땀 흘렸던 기억도 선명하다. “한창 배울 나이에 누군가 조금이나마 보살폈으면…. 예를 들어 1학년에게 3학년 수업을 가르치니 알 수도 없고, (시설에 갇혔으니) 엄마 아버지한테 가서 가르쳐달라고 할 수도 없었죠. 나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저들(시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최 씨는 원래 경북 경주가 집이었다. 기차역 나무 담벼락에서 개구멍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친구들과 아무 열차에나 올랐다가 부산으로 오게 됐다. 그러다 옛 부산시청 인근에서 경찰에 단속돼 영화숙으로 넘겨졌다. 최 씨가 4살 꼬마 즈음일 때다. 할머니가 흰쌀에 계란 노른자와 참기름을 비벼준 밥을 좋아했던 꼬마는 멀겋게 뜬 수제비국에 꽁보리밥만 간신히 끼니로 나오는 공간에 붙들리게 됐다. 1970년 이후 소 알로이시오 신부의 구원으로 영화숙에서 소년의집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숱하게 맞고 흙바닥을 굴렀다.

학교는 구경만 해봤다. “저희들이 학교 다닐 나이가 됐는데, 영화숙 옆에 장림국민학교가 있었어요. 깨끗한 옷을 한 벌 입혀가지고 거기로 갔었거든요. ‘입학을 하나보다’ 했는데 영화숙 사람이랑 학교의 대표되는 사람이 교무실에서 가서 무슨 얘기를 하고는 다시 돌아왔어요. 그 뒤로 영화숙으로 선생님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칠판 앞에 애들이 우르르, 백 몇 십 명이 앉아서 선생님 얼굴만 쳐다보고 있어요. 어차피 그 교육은 (학습 수준이) 나한테 맞는 교육이 안 되고, 될 수도 없는 환경이었죠.”

소년의집에 온 뒤론 학교에 나갔다. 남부민초 3학년으로 들어갔다. 꼬마 때부터 영화숙에 갇혀 한글을 떼지 못한 최 씨였다. 3학년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이게 대한민국 글자인데, 영어인지 중국어인지 모를 정도로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고학년이 돼서는 특별 교육까지 선생님들이 해 주셨다. 그렇게까지 해주셨는데도 기초가 안 되니 따라 읽고 쓰기가 너무 어려워 부끄러웠다”고 한다. 지금도 이런데 중학생이 되면 영어까지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겁났다. 그 길로 소년의집을 빠져나와 넝마주이 생활을 시작했다.

▮부랑인 재생산

어른이 되고 나서 최 씨는 먹고 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특히 가정을 꾸려 자식을 낳은 뒤로는 닥치는 대로 일했다. 구두닦이, 목욕탕 세신사, 호텔 커피숍 바리스타, 막노동, 제조업 공장 등 별별 업에 손을 댔다. 모자란 학력은 이미 폐교한 학교의 졸업장을 위조해 채워넣었고, 모르는 글자는 어떤 식으로든 읽은 체하며 위기를 넘겼다. 좀 더 나은 일자리를 가지고자 고향을 떠나 제주로, 충남 당진으로 옮겨 다녔다. 돈벌이에 뼈를 갈아넣었다.

힘에 부칠 때마다 절감한 건 교육 부재의 한계였다. “저는 항상 지금도 생각하는 게, 그때(영화숙 시절) 내가 조금만 배웠었으면 어디 회사에 가서도 먹고 사는데 큰 걱정은 안 하고 살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나 자신부터 아들내미, 딸내미가 세상에 나온 뒤로 온갖 걸 다 해봤어요.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봤었어요. 배우지 못했다는 게 정말 인생의 큰 한입니다.

김기현 씨 역시 1970년 시설에서 탈출한 뒤로 구두를 닦았고, 머지않아 재건대(등록 넝마주이 단체)에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세상은 김 씨 편이 아니었다. 탈출 직후 자신이 폐결핵에 걸린 사실을 알아 왼쪽 폐를 잘라내야 했다. 저들이 자신의 몸을 망가뜨렸다는 증오로 긴 시간 몸서리쳐야 했다. 증오가 결국에는 본인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언젠가 저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대검을 지니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김 씨는 택시를 몰거나 지게차 중장비를 끌고, 회사 통근버스를 운전하며 닥치는대로 일했다.

두 사람은 시설에 갇혀 사회적으로 성장할 시간과 기회를 빼앗겼다. 목숨을 건 탈출 끝에야 자립을 도모할 수 있었다. ‘부랑아 갱생’을 내세우던 시설의 실체다. 부모 있는 멀쩡한 아이를 멋대로 잡아들이곤 불우한 청년으로 재생산시키는 ‘부랑아 공장’에 불과했다. 국가는 이 같은 아동착취공장을 묵인했다.

“피도 안 섞인 외국인 신부님(소 신부)은 한국에 와서 싸워가며 자선사업을 했는데, 국가는 아이들을 돈벌이 착취 수단으로 내버려뒀지 않습니까. (시설에) 죽으러 가는가 살러 가는가 아무 것도 몰랐잖아요. 자기네들 앞의 사탕발림만 좋아했지, 결국 내가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이런 일은 이제 없어야 합니다.”(김 씨)

영상= 박세종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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