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죽음…‘재야의 장의사’가 되다

한겨레 2024. 7. 29.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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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13화 공동추모제
1990년 6월10일 성균관대에서 ‘제1회 전국민족민주열사 합동추모제 및 6월항쟁 계승 국민결의대회’를 끝낸 뒤 유가협 어머니들이 소복 차림으로 자식들 112명의 영정사진을 든 채 평화행진에 나서고 있다. 경찰의 저지로 행진은 중단됐고 청년학생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수배 중이던 조선대 이철규
광주 저수지에서 익사체로 발견
진상규명 요구 뒤 장례까지 도와
잇단 죽음에 유가협 회원 계속 증가
김거성 목사에게 장례 절차 등 배워

‘3당 합당’으로 민주화운동 훼손한
김영삼 등 규탄위해 ‘공동추모제’ 기획
열사 112명 영정사진·각종 자료 모아
1990년 첫 행사 뒤 지금까지 이어져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유가협 시절에 많이 들었던 얘기다. 내 동생의 죽음 이전에도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열사가 있었다. 대학생만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들이 죽어갔다. 전교조 결성 이후에는 참교육을 열망하는 고등학생들까지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의 주장과 요구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지향점은 한 방향이었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적 없던 죽음들을 접하면서 학생운동 이후 10년 동안 형성된 나의 인식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알아갔다.

지금까지 흘린 피가 너무도 많았다. 동생 래전이는 유서에서 “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민주의 성단에 바친다고 했다. 간절하게 자신의 뒤로는 더 이상 민주주의 제단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뒤로도 얼마나 많은 죽음들이 있었던가. 그들은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었다. 20대의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던지도록 만드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죽음은 몇 사람을 빼고는 대부분 잊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열사들의 이름은 몇이나 될까?

1990년 5월 박래군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조선대생 이철규의 의문사 진상 규명을 위한 단식농성에 함께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잇단 죽음에 맞서

1989년에도 죽음이 이어졌다. 그중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이철규 조선대 학생의 주검이다. 교지 편집장을 지냈던 이철규는 국가보안법으로 수배를 당하던 중에 실종되었고, 1989년 5월10일 광주시 북구 청옥동 저수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몸은 퉁퉁 불어 있었고, 얼굴은 불에 탄 듯 숯 빛깔이었다. 튀어나온 눈은 부릅뜨고 있었다.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말이 나왔지만 지금까지 의문사로 남아 있다. 이철규의 죽음 뒤 한동안 진상규명 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유가족들과 나도 명동성당 단식농성에 참여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관심에서 멀어졌다. 10월에 장례를 치를 때는 내가 내려가서 장례를 준비하고 진행해야 할 정도였다.

이소선 어머니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이런 죽음이 있으면 곧장 달려갔다. 경찰이 막아도 어떻게든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유가족 곁을 지켰다. 그들 손을 잡고 “지금부터 부모들이 독하게 맘을 먹어야 해. 안 그러면 아들을 빼앗긴다”고 말했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경찰과 정보기관은 죽은 이의 친척들을 모조리 뒤진 뒤 자신들 말을 듣는 이를 찾아내 온갖 거짓 정보를 유가족에게 전하게 했다. ‘내 자식이 빨갱이들에게 휩쓸려 죽기까지 했다’는 생각을 갖게 했고,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시도했다. 우리는 이에 맞서 그 죽음들을 지켜야 했다.

열사들 장례를 치르고 나면 유가족들은 긴장이 풀려 병이 나고는 했다. 그럴 때면 이소선 어머니의 얼굴은 더욱 퉁퉁 부어올랐다. 이한열 모친 배은심 어머니는 유난히 잠에 못 들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 나 그것 좀 줘 봐”하고 손을 내밀면 이소선 어머니는 약봉지를 뒤져 수면제를 건네고는 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전태일 선배가 죽은 뒤부터 투쟁 속에서 두들겨 맞고, 수없이 연행되고, 투옥되고, 수배돼 온몸이 만신창이었다. 매일 한 줌씩 약을 드셔야 견뎠다. 배은심 어머니는 “유가협은 회원이 늘면 안 되는 단체여. 회원이 느는 게 하나도 반갑지 않어”라고 말하고는 했다. 그런 바람과 달리 유가협 회원은 자꾸 늘어만 갔다.

장의사 사부 김거성 목사

유가협 사무국장 자리는 죽음을 늘 곁에 두는 자리다. 죽은 이들의 자료는 정리되지 않았다. 전국에서 들려오는 죽음의 현장에 달려가 장례를 돕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재야의 장의사’란 별칭을 듣게 되었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연세대학교의 김학민 선배가 장례를 기획하고 집행하였고, 이 과정을 '이한열, 유월하늘의 함성이여'이란 제목의 책으로 엮어냈다. 이 책을 교본으로 삼아 빈소를 차리고, 유가족을 안정시키고, 그런 다음에 꽃상여를 만들고, 의전과 운구, 노제, 하관까지 전 과정을 가르쳐준 이는 김거성 목사였다. 학교 선배이기도 한 김 목사는 유가협 후원회 부회장을 맡아 오랫동안 유가족과 관련된 활동을 하게 된다.

유가협 사무국장을 시작했던 1989년부터 몇 년 사이는 세계사에서도 중대한 변화의 시기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에는 소련이 붕괴했다. 1989년 중국에서는 공산당이 전국적인 시위를 탱크로 진압했다. 냉전이 끝나가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탄생했다. 김영삼이 노태우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 민주노조들이 연합해 전노협이 만들어진 것도 1989년 1월이었다. 안팎의 격변은 한국 진보운동진영에 큰 혼란을 불러왔다. 노동 현장에 들어가 있던 학생운동권 출신들은 현장을 떠나고 있었다. 이상으로 삼았던 사회주의 진영이 초라하게 붕괴하는 것을 지켜본 운동가들은 자신의 지향을 잃었다. 남아 있는 운동권들은 격렬한 사상논쟁을 벌였다.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추모식이며 장례식으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에 유가족들과 함께 지원을 나가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내게는 과제가 산적해 있었고, 돌봐야 할 유가족들이 있었다. 한울삶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젊은 유가족들도 있었다. 박종철 누나, 이한열 누나, 박영진 동생, 김윤기 동생, 김종태 동생, 강민호 동생, 김성수 동생, 이재식 딸 등이 그들이었다. 부모들과 나누지 못하는 슬픔과 아픔을 그들은 나와 나누었다. 나도 친동생을 대하듯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1990년 1월에 3당 합당이 이뤄졌다. 여소야대 국면이 순식간에 여대야소로 변했다. 김영삼이 노태우, 김종필과 손잡고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했다. 그때 통일민주당 당사는 마포 공덕동 제일빌딩에 있었다. 그곳에 쫓아갔지만 경찰에 막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유가족들은 분노했다. 김영삼의 배신이었다. “열사들이 통곡한다. 민자당은 자폭하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항의투쟁을 했지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제1회 범국민추모제

이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유가협과 열사 추모사업회들이 논의를 이어갔다. 결론은 공동추모제로 모였다.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훼손하고 학살원흉과 손잡은 김영삼에 맞서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대중적으로 확인하는 투쟁이었다. 그때까지는 개별 열사들의 추모식만 있었다. 대학이나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추모사업도 잘 진행됐지만, 다른 열사들은 추모식마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유가족들도 좋아했다. 결정이 난 뒤에는 분주해졌다. 열사들 추모사업회에 연락해 영정사진부터 모았다. 그 밖에의 각종 자료를 수집·정리해 ‘살아서 만나리라’라는 제목의 자료집을 냈다. 살아서는 만나지 못할 이들에 대한 그리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들은 전국에서 모은 열사들 영정 사진을 만드는 일을 함께했다. 내 자식의 영정인 듯 “예쁜 것들”이라고 말하며 사진을 쓰다듬었다.

공동추모제 명칭은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로 정해졌고, 1990년 6월10일 성균관대학교에서 하기로 했다. 6월9일 밤, 6월항쟁 5주년을 기념해 거리에서 투쟁한 학생들과 노동자·시민들이 성균관대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금잔디광장에서 밤샘농성을 했다. 열사 112명의 영정을 올릴 제단을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문제는 10미터가 넘는 대형걸개그림을 거는 일이었다. 그때는 장대 나무로 아시바(비계)를 세웠다. 휘청휘청하는 나무를 타고 건설노동자들이 아시바를 세웠고, 거기에 대형걸개그림이 걸렸다.

112명의 영정을 한 자리에 올린 추모식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저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다는 다짐과 결의가 자연스레 모였다. 합동추모제가 끝난 다음 ‘산자여 따르라’는 유가협 깃발을 앞세운 채 행진이 시작되었다. 행진의 앞자리에는 흰색 상복을 입은 어머니들이 자식 영정을 들고 섰다. 성균관대 정문 앞에서 경찰들이 막아섰다. 한사코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경찰을 향해 어머니들이 울부짖었다. 여기저기서 몸싸움이 일어나고 어머니들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결국 행진은 무산됐다. 그때 시작된 범국민추모제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직 민주주의가 오지 않은 탓이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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