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의 정치사기] 필리버스터 퇴보 역사 끝내라

김세희 2024. 7. 2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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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희 정치정책부 기자
1971년 연설하는김대중. <김대중 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우리 정치인은 오늘의 현실을 다루는 동시에 내일을 내다보는 사람들입니다….(중략)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이 국토가 양단되고 정변이 계속되고 이렇게 혼란이 극한 나라에서 우리가 정치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와석종신(臥席終身, 제명을 다 살고 편안히 자리에 누워서 죽음) 할 수 있는 생각을 갖겠습니까."

헌정 사상 최초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으로 기록된 1964년 4월 20일 김대중(DJ) 민주당 의원의 국회 본회의 연설 내용 중 일부다.

당시 DJ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를 받은 민주공화당이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처리하려는 데 맞서 장시간 연설을 했다. 김 의원이 한·일 협정 논의 과정에서 "여당이 1억3000만달러를 받아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폭로한 것을 이유로 구속하는 건 부당하다는 내용이다.

DJ의 발언은 38쪽에 달하는 국회 속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DJ는 단순히 시간을 끌기 위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 체포동의안을 처리하면 안 되는 이유를 확실히 내세웠다.

"(김 의원이 폭로한) 1억3000만불 수수가 사실인지 아닌지 철두철미하게 규명하자 이것만은 우리가 원의(여야 합의)로써 한 사람의 이의 없이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철두철미하니 규명하는 데 있어서 지금 유일한 증거적인 존재는 김 의원입니다. 김 의원이 내놓은 문제에 대해서 본인이 자유롭게 있어야만 자기가 원하는 증인도 데려올 수 있고 자기가 원하는 증거물도 내놓을 수 있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논리가 명쾌했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도 않았다. 집권 여당인 공화당을 다독이면서 대승적인 결단을 촉구했다. DJ는 "김 의원을 구속하고 결말이 불투명하게 나면 야당은 계속 의문을 제기하고, 국민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이것이 여러분께 손해가 되면 되었지 이익이 될 것이 무엇이냐"고 했다. 또 장면 정권의 소급입법과 군사정부의 정치정화법을 비교하면서, 모든 사안을 역지사지의 시각에서 협의해 국가발전을 이뤄나가자고 강조했다.

구속 동의 당사자인 김 의원을 놓고는 일본제국주의 하의 독립운동 투신과 투옥, 정부 수립에 공헌, 민주주의 확립에 대한 기여 등을 열거하며 수차례 구속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다만 "김 의원이 자기 발언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갖고 있다"면서도 "말에 단정적인 표현은 있다"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김대중의 5시간 19분 필리버스터로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상정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DJ의 측근들은 이들 두고 '연설의 정석'이라고 평가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 이후 국회에서 주목을 끈 장시간의 필리버스터는 여러차례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설득보다 반대를 위한 반대에 치중해 국민적 공감을 얻은 연설은 비교적 적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최근 4박5일 가량 진행되는 필리버스터는 더 공감하기 어렵다. 거야인 더불어민주당은 이른바 '방송4법' 강행 처리에 나서고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로 맞서는 상황이 무한 반복되고 있다. 방송4법은 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방송통신위원회법 개정안이다. 공영방송인 KBS·MBC·EBS 이사 숫자를 늘리고, 언론단체 등에 이사 추천권을 부여하는 내용이다.

이 법안들은 언론 자유와 공정의 가치뿐만 아니라 정치권의 헤게모니와도 결부돼 있다. 이 때문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국회 때 거부권을 행사했고, 이번에도 거부권 행사가 유력하다. 사실상 폐기가 예정된 법안인 셈이다. 지난 25일부터 28일 오전까지 방통위법과 방송법 처리에만 54시간이 걸렸고, 30일 오전에야 4개 법안 처리가 완료될 전망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들이 반복적이라는 데에 있다. 민주당은 오는 8월 1일 본회의에서 이재명 전 대표의 총선 공약인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과 '노란봉투법' 처리를 추진 중이며,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로 대응할 계획이다.

두 법안도 예산과 이해관계에 따른 쟁점이 존재한다. 결국 이들 법안을 둘러싸고 쓸데없는 공방만 벌이느라 시간만 낭비하게 될 것이다. 필리버스터의 내용 역시 국민에게 어떤 울림도 주지 않는다.

이러는 사이 민생 과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국민들의 원망은 깊어간다. 누군가 의원들에게 이렇게 일침을 놓는다. "우리들은 먹고 사는 데 바빠서, 당신들이 무엇을 갖고 싸움박질하는 지 관심도 없어요."

이것이 현실이다. 국민들은 당장 먹고 사는 문제, 노후 등 '자신의 삶'과 직면하는 화두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굳이 필리버스터를 하고 싶다면 민생 현안이나 고매한 가치 등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이길 바란다. 그렇다면 국민이 쳐다보기라도 할 것이다. 정치정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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