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뻔뻔한 상장사 막으려면 거래소 ‘행동’이 필요하다
코스닥 상장사인 하나기술은 29일 장 중 프랑스 업체와 130억 원 규모의 이차전지 조립라인 장비 턴키 공급 계약을 맺었다는 내용의 단일판매·공급계약체결 공시를 냈다. 계약금액은 지난해 이 회사 연매출의 10%에 해당하는 작지 않은 규모다. 회사는 상대의 영업비밀 보호 요청을 이유로 계약 상대방이 누구인지 공개하지 않았다.
이번 단일판매·공급계약체결 공시는 이 회사가 지난해 6월 발표한 공급 계약 공시와 판박이다. 당시 하나기술은 회사 연매출의 1.5배가 넘는 대규모 공급 계약 체결 공시를 내면서 영업비밀을 이유로 계약 상대방을 밝히지 않았다. 회사가 아시아 지역 이차전지 제조사라고 기재한 것을 근거로 증권가에선 발주처가 중국 대형 이차전지 기업일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하나기술 주가는 급등했다. 하지만 일 년 뒤인 지난달 20일 하나기술은 돌연 계약 해지 공시를 냈다. 주가는 5거래일간 30% 넘게 급락했다.
한국거래소는 이달 1일 공시 번복을 사유로 하나기술에 대해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할 수 있다고 예고했다. 이어 22일 벌금 7.5점을 부과하고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했다. 솜방망이 조치란 비판이 잇따른다.
코스닥 상장사는 단일판매·공급계약 금액이 전년도 매출액의 10% 이상(유가증권시장은 5%)이면 의무적으로 공시를 해야 한다. 공시에는 금액, 기간, 발주처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단, 비밀 보호 요청이 있으면 계약 상대방이나 계약금액을 일정 기간 공개 유보하는 것이 허용된다.
투자자들은 공시를 주요한 투자 지표로 삼는다. 거래소가 승인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행 규정상 상장사가 대규모 계약 공시를 하고 이행하지 않아도 제재는 미미한 수준이다. 향후 명확한 이유 없이 계약 해지 공시를 내도 거래소가 해당 기업을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하고 벌점과 제재금을 부과하는 정도가 전부다. 이 때문에 상장사가 주가를 띄우기 위해 공급계약 공시를 악용한다는 비판이 줄곧 있었다. 거래소가 기업이 양식에 맞는 서류만 작성하면 공시를 승인해주는 구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기술 사태’를 계기로 늦게나마 거래소는 이달 초 단일판매·공급계약체결 공시 관리 기준 개선에 착수했다. 계약 체결 공시에 대한 승인 과정부터 이후 계약 진행 과정, 번복·변경 등에 따른 제재 등을 포괄적으로 개선하는 방안이 담길 것으로 확인됐다.
공시한 계약이 이행 가능성이 충분한지, 계약금·선급금 등이 정상적으로 입금이 된 후 예정대로 추진되고 있는지 등을 투자자도 알 수 있어야 한다. 또 발주처의 재무상태는 건실한지 등도 투자자가 확인 가능한 방향으로 개선이 필요하다.
물론 모든 기업의 계약 해지 공시를 고의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경영 과정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거래소는 공시 제도가 상장사에 과도한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 투자자에게도 효율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균형점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개선안 마련과 관련해 별다른 진척이 없다는 점은 아쉽다. 거래소는 아직 개선안 초안을 마무리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거래소 측은 과거 5년간 공시 사례를 토대로 실무팀과 제도팀이 산업별, 계약 규모별 불성실 공시 특성을 파악하고, 대안을 도출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는 입장을 밝혔다. 연내 관련 초안을 완성해 내년부터 강화된 공시 제도를 시행하는 게 거래소 측 계획이다.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충분한 검토와 외부 자문을 거쳐야 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7월 들어서만 삼부토건, 비에이치아이, 아이톡시, 휴마시스 등 상장사 9곳이 단일판매·공급계약 해지 공시를 냈다. 계약 규모는 최소 20억원에서 최대 2620억원에 달한다. 계약 해지 공시가 나온 직후 매매거래 정지 상태였던 태영건설을 제외하고 비에이치아이, 삼부토건 등 7곳의 주가가 떨어졌다. 회사 공시를 믿고 투자했던 투자자들은 손실을 볼 수밖에 없다.
개선책 도출이 무슨 이유로든 미뤄져서는 안 된다. 거래소가 상장사의 무책임한 공시 뒤집기를 방관했다는 ‘오해’를 사지 않으려면 공시 관리 기준 강화에 속도를 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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