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빵집’ 청문회를 보는 서글픔 [김영희 칼럼]
김영희 | 편집인
한겨레에 ‘이진숙 기자’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1991년 5월25일치 13면에 실린 ‘“홍콩신문 기사 편파적 인용” 문화방송노조 반론 방영요구 등 반발’ 기사에서였다.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숨지고 젊은이들의 분신이 잇달던 그해, 정권은 유서대필 조작으로 정국을 돌파하려 했다. 문화방송(MBC)은 당시 이 논란을 다룬 꼭지에 이어 연세대 앞 철길에서 분신한 이정순을 아무도 돕지 않았다는 외신 보도를 배치했다. 데스크에 왜곡편파 보도라며 항의했던 사회부 이진숙 기자는 며칠 뒤 언론노보에 자신이 본 현장 상황을 자세히 기고했다. 정권에 의해 유서대필범으로 몰린 강기훈이 무죄를 선언받는 데는 24년이 걸렸지만, 이진숙과 시사저널·언론노보의 상세한 사진보도 덕에 이 논란은 더 이상 번질 수 없었다.
지난주 이례적으로 사흘간 계속된 그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후보 청문회를 지켜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한때 열혈 노조활동을 했던 이의 전향을 뭐라 할 생각은 없다. 그런 사람이 한둘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쓴 법인카드 내역마저 “사적으로 단 1만원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할 뿐 일체의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모습은 너무나 구차하고 비루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법인카드 사용 내역을 과장하거나 꼬투리 잡아 상대편을 쫓아내는 보복의 악순환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가 주말에 회사 관용차를 이용해 골프를 치거나 자택 부근에서 법인카드를 과다하게 썼다는 의혹 또한 회사 사업과 관련성을 따져 가려 제기할 문제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는 도를 넘었다. 유일하게 내겠다던 대전 성심당 빵집 포인트 내역조차 “빵을 구입한 사람이 개인정보가 드러난다며 반대한다”며 제출을 거부했다. 이 후보자는 희화화하지 말라고 했지만 ‘빵집 청문회’ 상황을 자초한 건 본인이다. 자신의 안위와 관계없이 본 것을 말하던 33년 전의 이진숙은 없다. 상식적인 이들 눈에는 최소한의 품위도 없는 뻔뻔함과 권력욕만 보일 뿐이다.
나아가 그는 5·18 민주화운동을 극도로 폄훼한 지인의 에스엔에스에 ‘좋아요’를 누른 이유를 묻자 ‘좋아요’ 연좌제, 지인 연좌제 아니냐며 비아냥대다 “앞으로는 특히 제가 공직에 임명된다면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 표시를 하는 것에 조금 더, 손가락 운동에 조금 더 신경을 쓰겠다”고 답했다. 일본군 ‘위안부’가 강제냐, 자발이냐를 묻는 질문엔 ‘논쟁적 사안’ ‘개별적 사안’이라며 답을 거부했다.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던 영화 대사가 떠올랐던 게 나뿐일까.
한때 과격한 운동권 투사였다가 180도 돌아선 이 정권의 일부 고위층도 청문회에서 이런 인식을 감히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서글프고 섬뜩하다. 문화방송을 나와 정치권 언저리를 돌면서 했던 여러 인터뷰에서 ‘균형 보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이 후보자가 방송정책을 좌우하게 되면, 5·18을 이리 조롱하는 의견도 균형 보도라며 방송사들이 내세우게 될지 모를 일이다. 민주화 역사도, 사회적 참사도 정쟁 대상으로 상대화시켜버리는 공영방송의 재등장 우려는 그저 기우로만 볼 수 없다. 최근 한국방송(KBS)은 생중계를 하던 자사 기자의 노트북에 붙은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다시보기 영상에서 모자이크 처리하고 유튜브에선 아예 꼭지를 삭제했다. 사장이 바뀐 뒤 한국방송은 세월호 10주년 특집 다큐도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제작을 중단한 터다.
영국 비비시(BBC)의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보도는 공영방송의 의미에 대해 지금도 시사점을 준다. 비비시가 영국군을 ‘아군’이 아니라 ‘영국군’이라 보도하자 마거릿 대처 총리가 “포클랜드로 아들을 보낸 영국 어머니의 눈물을 생각하라”며 격노했다. 이에 대한 비비시의 응수는 “아르헨티나의 어머니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직자, 특히 방송정책 수장으로서 ‘바닥’을 드러낸 이 후보자를 윤석열 대통령은 임명 강행할 테고 야당은 다시 탄핵소추로 맞설 것이다. 대통령의 방송4법 거부권 행사도 기정사실로 되고 있다. 캄캄한 밤, 분노와 절망만으로 길을 찾을 순 없다. 접점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국민의힘 신동욱 의원은 야당의 방송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무제한 토론에 나서면서도 지금 법이 여권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정권 교체에 따라 기자나 피디들이 쫓겨나는 일이 다신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비아냥, 고성이 난무한 이번 청문회에서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이 윤창현 언론노조 위원장을 불러 임명동의제의 의미와 실태 등을 듣고 차분한 질의로 이 후보자의 모순과 정책적 허점을 드러낸 때였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냈던 중재안의 모멘텀을 살릴 방안을 여야가 모색하길 간절히 바란다.
편집인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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