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시각] 빛바랜 구영배 신화

김은영 기자 2024. 7. 2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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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배 큐텐그룹 대표는 국내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업계에선 ‘성공 신화’의 표증이었다. 인터파크의 창립 멤버였던 그는 사내 벤처로 시작한 지마켓으로 국내 이커머스 시장을 장악하고, 미국 나스닥에 상장시켰다. 그리고 지마켓을 미국 이베이에 매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5년 후 구 대표의 성공 신화는 흔들리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큐텐그룹의 계열사 티몬·위메프 두 곳에서 동시에 발생한 정산금 미지급 사태 여파가 소비자와 금융·산업계로까지 번지면서다. 금융당국은 두 업체의 미정산 대금을 최소 2100억원 수준으로 추산했으나, 지난달 양사 플랫폼의 결제 추정액이 1조2500억원임을 고려하면 이달까지 누적 미정산액은 조 단위일 것으로 업계는 예상한다.

사라진 정산금은 다른 플랫폼을 인수하는 데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큐텐그룹은 물류 자회사 큐익스프레스의 나스닥 상장을 위해 최근 2년 사이 티몬, 위메프, 인터파크커머스, 미국 이커머스 위시, AK몰 등을 줄 인수해 몸집을 키웠다. 이중 티몬과 위메프는 지분 교환 방식으로 인수했고, 인터파크 커머스(1871억원)와 위시(2300억원)는 현금으로 인수했다. 야놀자로부터 인수한 인터파크 커머스의 인수대금은 아직 다 지급되지 않았다.

몸집은 커졌지만, 인수사들의 재무 상태는 부실했다. 티몬과 위메프의 경우 완전 자본잠식 상태였다. 그러나 큐텐그룹에 인수된 후 모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기는커녕 모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상황이 연출됐다. 모기업도 부실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 있는 큐텐과 물류 자회사 큐텐익스프레스의 2021년 기준 누적 결손금은 각각 4310억원, 1292억원이었다.

결과적으로 인수한 플랫폼들이 모기업의 돈줄이 된 셈이다. 티몬과 위메프의 재무를 인수 후 큐텐이 총괄·관리했다는 사실이 이런 주장에 힘을 싣는다.

구 대표는 방만한 경영에 이어 사태 발생 후 보인 소극적인 대처로 피해자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큐텐그룹은 사태 발생 초부터 핑계와 거짓말로 일관해 왔다. 지난 11일 본지가 위메프와 티몬, 위시의 정산 지연 사태를 보도했을 때 큐텐 측은 “전산 시스템에 오류가 있었다” “티몬은 정산이 지연되지 않았다”라며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그러나 이는 며칠 후 거짓으로 밝혀졌다.

지난 24일 소비자들이 위메프와 티몬 본사에 찾아가 본사를 점거하고 항의했을 땐 계열사 대표와 본부장의 입을 통해 “환불 자금 30억원을 확보했다” “중국에 보낸 600억원이 있다” 등의 면피성 발언을 흘리며, 현장에 온 일부 고객에게만 환불을 진행해 셀러와 소비자의 혼란을 부추겼다.

26일 정부가 사태에 정면 대응하겠다고 나섰을 때도 그는 숨은 채였다. 오히려 이날 구 대표는 큐익스프레스의 최고경영자(CEO)를 사임했고, 신임 마크 리 대표는 “큐익스프레스와 정산 지연 사안은 직접적 관련이 없다”라며 선을 그었다.

29일 언론 보도자료를 통해 첫 입장을 밝힌 구 대표는 “그룹 차원에서 펀딩과 인수·합병(M&A)을 추진하고 있다”며 자신이 가진 재산의 대부분인 큐텐 지분 전체를 매각하거나 담보로 활용해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피해 규모를 정확히 추산하지도 못했고, 구체적인 자금 동원 방안도 내놓지 못했다.

입장문 말미에는 자신의 업력을 나열하며 “금번 사태로 인해서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더 높이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싶다”라고 했다. 돈을 받지 못해 도산하게 생긴 셀러와 휴가를 망친 소비자에게 그의 도전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성공의 반은 죽을지 모른다는 긴박한 상황에서 비롯되고, 실패의 반은 잘 나가던 때의 향수에서 비롯된다”라고 했다. 구 대표의 입장문은 긴박하기보다 아직도 성공의 향수에 취해있는 듯해 불안하다. 큐텐그룹을 둘러싼 모든 이해관계자가 그에게 바라는 건 단 하나다. “당장 내 돈을 돌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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