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에 취해 뚝딱뚝딱 만들지 않고… ‘그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왔다[주철환의 음악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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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가 예능을 뒤덮던 1990년대 초 이야기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린 지 30여 년이 지나 그가 걸어온 길을 차분히 헤집어 보니 그는 대중에게 박수받는 쪽으로 내달리진 않았다.
함께 작업한 가수나 스태프들은 가끔 진저리를 치기도 하지만 그는 절대로 분위기에 취해 뚝딱뚝딱 음악을 생산하지 않았다.
알아주는 사람에게 보답하려고 음악을 한 게 아니라 실험하고 모색하며 '나의 길'을 걸어왔기에 그가 쌓은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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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가 예능을 뒤덮던 1990년대 초 이야기다. 작품이 선정되면 캐스팅에 들어가는데 기준은 간단하다. 역(役)에 어울리는 연예인 명단을 뽑아 섭외하기 어려운 사람부터 전화를 돌린다. 세상일이라는 게 대체로 비슷해서 인기 있는 사람은 연락을 피하고 인기 없는 사람은 스스로 찾아와 줄을 선다.
오늘의 작품은 스토킹을 다룬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다. ‘미저리’(1990)보다 거의 20년 앞서 나왔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을 맡았다. 그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안개’(정훈희의 ‘안개’가 아니고 ‘Misty’)라는 노래만 신청하는 청취자(제시카 월터)가 라디오 DJ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내용이다. 원제목도 ‘‘안개’ 틀어주세요’(Play Misty for Me)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로버타 플랙의 ‘그대를 처음 본 순간’(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이 흐른다.
여주인공(최진실) 섭외는 순조로웠다. 신인 시절 그야말로 처음 본 순간부터 공들인 터라 망가지는 연기도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남자 주인공이었다. 현역 DJ 중에 고르는 게 좋을 듯해서 탐색하니 딱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이별의 그늘’ ‘가려진 시간 사이로’의 작곡가 겸 가수 윤상이다. 연기를 해본 적도 없고 코미디프로에 나와 웃음을 준 적도 없는 그야말로 탐나는 순도 100% 청정 연예인이다. 예상한 대로 수줍게 고사하는데 이럴수록 매달리는 게 예능 PD의 전투력이다. 이 국면에선 위협(?)보다 찬양이 유효하다. 그의 노래 일부를 모창까지 하면서 기어이 카메라 앞으로 불러냈다.
음악동네에도 길이 있고 줄이 있다. 그때 만약 윤상이 제작진 앞에 다소곳이 줄을 섰다면 나는 그를 캐스팅하지 않았을 거다. 이미지를 확장하는 연기를 요구할 때 가끔 쓰던 말이 살신성인이다. 그대 한 몸 불살라 대중을 즐겁게 하라는 주문인데 당사자가 마음으로부터 동의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자연스럽게 오늘의 핵심어는 줄이 됐다. 주변을 보면 요령 있게 줄넘기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줄을 긋고 사는 사람도 있다. 줄을 잘 서는 사람도 있고 줄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있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줄을 잘못 서면 줄줄이 낙마하거나 중상을 입는다. 밥줄, 돈줄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포승줄로 바뀌는 경우도 더러 보았다.
윤상은 곱상한 외모와 감미로운 음성으로 여러 형태의 줄을 탈 수도 있었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린 지 30여 년이 지나 그가 걸어온 길을 차분히 헤집어 보니 그는 대중에게 박수받는 쪽으로 내달리진 않았다. 오히려 대중보다는 전문가(음악인)들로부터 인정과 환영을 받았다. 함께 작업한 가수나 스태프들은 가끔 진저리를 치기도 하지만 그는 절대로 분위기에 취해 뚝딱뚝딱 음악을 생산하지 않았다.
예술을 대중 눈높이에 맞출 필요는 없다. 팬심의 동향에 음악인이 귀를 기울일 의무도 없다. 알아주는 사람에게 보답하려고 음악을 한 게 아니라 실험하고 모색하며 ‘나의 길’을 걸어왔기에 그가 쌓은 공든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사실 줄을 잘 서야 하는 건 언어도 마찬가지다. 빛을 발하는 어느 별이나 숨겨진 그늘이 있게 마련인데 이 별이 서로 붙어있으면 이별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딱 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너무 가깝게 밀착하면 딱한 사람 되는 건 시간문제다.
작가·프로듀서·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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