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수사로 찾아낸 성폭행 흔적…"끝까지 파보자" 검사 끈기

유영규 기자 2024. 7. 29.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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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동부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 허창환 검사

"서로 진술이 다르면 누구 말이 맞을지 계속 고민하며 기록을 더 열심히 봅니다. 그러면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하나씩 보이는데 이번 사건도 그런 케이스였어요."

서울동부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 허창환(36·사법연수원 43기) 검사는 지난 26일 언론 인터뷰에서 사건기록을 보던 순간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허 검사는 피해자 진술 외에 객관적 증거가 없는 성폭행 사건에서 DNA·화학분석과 재감정을 통해 준강간 혐의를 밝혀냈습니다.

이 사건은 최근 대검찰청의 2분기 과학수사 우수 사례로 선정됐습니다.

A 씨는 2022년 11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온 피해자와 술을 마신 뒤 만취한 피해자를 호텔로 데려가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습니다.

피해자는 첫 112 신고와 경찰 조사에서 일관되게 성폭행 피해를 주장했으나 A 씨는 부인했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피해자 의류 등에서 A 씨의 DNA를 검출했지만 정액 반응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A 씨를 끈질기게 추궁했으나 9개월여 만인 지난해 8월 준강제추행 혐의로 검찰에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해자 진술 외에 뚜렷한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준강간 혐의를 적용했다간 무죄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을 넘겨받은 동부지검은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DNA·화학분석과에 피해자 속옷의 정밀 감정을 의뢰했습니다.

대검 DNA·화학분석과는 국과수 감정 결과를 교차 검증해 보충·보완하거나 오류를 바로잡기도 하는 검찰 내 감정기관입니다.

허 검사가 한 달에 처리하는 사건만 130여 건이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나 적용된 혐의와 상반되는 피해자 진술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무엇보다 실제 저지른 범행의 죗값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형법은 준강제추행을 10년 이하 징역 또는 1천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나, 준강간은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하고 벌금형은 불가능하게 해놓아 더 높게 처벌합니다.

준강간죄는 심신상실이나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간음을 성폭행에 준해 처벌합니다.

허 검사는 "다른 정황을 봤을 때도 피해자 진술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며 "의심 가고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보완 수사를 해서라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관계를 끝까지 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떠올렸습니다.

DNA·화학분석과는 증거물에서 시료 채취 범위를 넓혀 A 씨의 타액과 정액을 검출해냈고, 허 검사는 이를 토대로 4월 A 씨에게 준강간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습니다.

그는 "국과수는 1차 감정을 담당하기 때문에 모든 사건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검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사건 방향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허 검사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 발령받은 지는 5개월째입니다.

그는 "혐의를 소명해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서 객관적 증거를 새롭게 찾아내 피의자가 자백하고 사건이 잘 처리될 때 보람을 느낀다"며 약자 보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난 5월 '강남역 교제 살인'과 최근 전 남자친구에게 불법 촬영과 영상 유포 협박을 당한 유튜버 '쯔양' 사건 등 연일 쏟아지는 교제 폭력 사건은 허 검사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해 생기는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잠정조치'를 적극 활용하면서 더 꼼꼼하게 사건을 처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소 후에는 검찰 피해자지원실로부터 심리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피해자 보호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허 검사는 지난해 광주지검 공판부에 있을 때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 재판을 담당하며 4명의 폭행과 위증 혐의 등을 추가로 밝혀내 전국 검찰청 공판 우수 사례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기록도 한 번 더 살펴보고, 당사자 진술도 한 번 더 들어서 꼼꼼히 사실관계를 확인하자고 늘 다짐합니다. 우리 사회에 무언가 기여하는 검사가 되고 싶어요. 그렇게 더 노력해서 새로운 진실을 밝혀내고 최대한 억울한 사람이 안 나오도록 하고 싶습니다."

(사진=연합뉴스)

유영규 기자 sbsnewmedi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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