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선임, 기강 잡으려다 기강 해친 역설적 사례

이상원 기자 2024. 7. 29.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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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국가대표팀을 둘러싼 소란이 홍명보 감독 선임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절차를 무시한 선임 과정은 허술했다. 박지성을 비롯한 축구계 인사 다수가 공개 비판에 나섰다.
홍명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7월1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기 전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지성이 홍명보에게 반기를 들었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선임 논쟁을 자극적으로 요약해 표현하자면 이렇다. 홍명보 전 울산 HD FC 감독은 한국 축구의 얼굴이다. 23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네 차례 월드컵에 출전했다. 박지성 전북 현대 모터스 테크니컬 디렉터는 한국 선수들의 해외 진출에 물꼬를 튼 전설이다. 선수 시절 주장 홍명보와 신성 박지성은 함께 2002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끌었다. 그런 박지성이 7월12일 기자회견을 열어 홍명보 국가대표팀 감독 선임을 비판했다.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라며, 대한축구협회(KFA)의 홍 감독 임명 번복에 대해서도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박지성 테크니컬 디렉터가 이 정도로 목소리를 높인 일은 찾기 어렵다. ‘레전드’이자 국가대표 선배인 홍명보 감독 선임이 그 대상이기에 더욱 놀랍다. 박지성 외에도 수많은 축구계 인사와 팬들이 들고일어난 큰 사건이다.

배경은 KFA의 연이은 헛발질이다. 홍명보 감독의 전임자인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은 2023 카타르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졸전 끝에 패배한 뒤 지난 2월 경질됐다. 선수들 사이의 불화가 외신에 보도되는 일도 벌어졌다. 클린스만 감독이 올바른 절차 없이,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주도로 임명되었다는 의혹이 뒤늦게 제기됐다(〈시사IN〉 제859호 ‘클린스만 내쫓고 화해 사진 찍었지만’ 기사 참조). 국가대표 감독 후보자를 추천하는 KFA 전력강화위원회는 올해 5월까지 후임 감독을 찾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식 감독을 선임하는 대신 23세 이하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던 황선홍에게 성인 대표팀을 겸직시켰다. 일각의 “업무 과부하” 주장은 기우가 아니었다. 황 감독이 맡고 있던 23세 이하 국가대표팀은 지난 4월26일 2024 카타르 U-23 아시안컵에서 8강에 머물렀다. 한국보다 약체로 평가받은 인도네시아를 상대로 패배해 4강 진출에 실패했다.

7월8일, 갑작스러운 홍명보 감독 선임은 흉흉한 민심에 불을 지폈다. K리그 현직 감독을 ‘빼왔다’는 게 우선 문제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축구계 전체를 둘러봐도 프로팀 감독이 시즌 중 팀을 옮기는 일은 큰 결례다. 더구나 홍 감독이 맡고 있던 울산 HD는 현재 K리그 1·2위로 우승 경쟁 중이다. 울산 HD는 이경수 수석코치의 감독대행 체제로 잔여 경기를 소화하게 됐다. 선임 발표 이틀 뒤인 7월10일 광주 FC와의 경기 후, 화난 울산 홈팬들은 단체로 “홍명보 나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온라인상의 비판은 더욱 거칠고 날이 서 있다.

7월10일 울산 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1 울산 HD와 광주FC의 경기에서 울산 HD 팬들이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홍명보 감독과 대한축구협회를 비판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연합뉴스

홍명보가 아니면 누구였어야 할까. 외국인 감독 선임을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유럽에서는 젊고 유능한 전술가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 아니더라도 데이터 기반으로 참신한 전술을 들고 와 빅 클럽에서 이름을 떨치는 사례가 많다. 더구나 7월12일 기자회견에서 박지성 테크니컬 디렉터가 말했듯 “역사상 이렇게 많은 외국인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원한 적”이 없을 정도로, 손흥민·이강인을 필두로 한 한국의 스쿼드는 매력적이다. 외국인 감독 요구는 축구 사대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시도에 대한 갈망이기도 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세계 축구계 유행에 어둡고 인맥을 중시하는 KFA 일부 인사들이 의도적으로 외국인 감독을 배척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감독 물색 과정은 요식행위였을 뿐 올해 초부터 홍명보 감독을 내정해뒀다는 것이다. ‘이름값에 의존한다’ ‘KFA가 휘두르기 편하다’ ‘학연이 작용했다’ 등 음모론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난도 있다.

“지난 5개월간 뭘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KFA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외국인 감독을 택하지 못한 나름의 합리적 이유도 있다고 말한다. “KFA로서도 덮어놓고 외국인을 비토하거나 내국인만 고집할 이유는 없다. 세계 정상급 감독이 온다면 (KFA의) 누구라도 쌍수 벌려 환영한다. 그런데 돈 문제가 있다. 그런 명장들은 연봉 수준이 턱없이 높다. 게다가 외국인 감독들은 국내 체류 비용이 든다. 국내 감독과 견주어 ‘가성비’ 생각이 들 만하다.” 위르겐 클린스만 전 감독은 대표팀 사령탑임에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재택근무’를 고집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계약서에 한국 체류 조항을 넣어야 하는데 외국인 감독들은 그 비용을 추가로 요구한다. 거칠게 말해 ‘동급 감독’이라도 외국인이 한국인보다 더 비싸다는 것이다. KFA가 접촉했던 외국인 지도자들은 제시 마시 전 리즈 유나이티드 FC 감독, 다비트 바그너 전 노리치 시티 FC 감독, 거스 포옛 전 그리스 대표팀 감독 등으로 알려져 있다. 이임생 기술발전위원장은 7월8일 한 외국인 감독과 협상이 결렬된 까닭을 “국내 체류 기간과 그에 따른 부수적 비용”이라고 밝혔다.

홍명보 감독의 강점은 ‘기강’이라고 꼽힌다. 7월8일 이임생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지난 외국인 감독 두 명을 교훈 삼아 팀 내 자유로움 속에 기강은 필요하다”라고 본 게 홍 감독 선임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손흥민·이강인의 다툼을 계기로 대표팀 분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전술 역량이나 훈련 세션의 질과 별개로 ‘아우라’가 있어야 스타 플레이어들도 따른다. 이 문제의식은 정몽규 회장도 공유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감독 능력에 의문부호가 붙은 인물이었지만 이름값은 높았다. 올해 초 아시안컵 기간 한 보도에 따르면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은 “(클린스만 감독은 손흥민 선수 소속팀) 토트넘의 회장과 직접 통화하는데 손흥민도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클린스만 감독은 선수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관리형(혹은 방치형) 감독이었다. 자신의 명성을 팀 장악에 활용할 의지가 없었다는 의미다. 홍명보 감독은 상대적으로 팀의 고삐를 쥐는 유형에 가깝고, 대표팀 선수들과 선후배 관계로 묶여 있기에 기강 유지에 이롭다는 게 이임생 위원장을 비롯한 KFA 일부 인사들의 판단으로 보인다.

이임생 대한축구협회 기술총괄이사가 7월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차기 대표팀 감독으로 홍명보 울산 HD 감독을 내정한 것과 관련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던 중 물을 마시고 있다.

문제는 절차다. 이 모든 의사 결정이 물밑에서, 사실상 한 사람의 주도로 긴급하게 이루어졌다. 홍명보 감독은 면접을 본 적이 없다. 정몽규 KFA 회장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이임생 위원장이 한밤중에 홍 감독을 찾아가 부임을 요청했다. KFA가 접촉한 한 외국인 감독은 한국 대표팀에 대한 발표 자료 50여 장을 준비해 면접에 임했다고 전한다. 물론 홍명보 감독은 언론에 거론된 외국인 감독들보다 월드컵 경험이 풍부하고 적응 기간도 짧을 것이다. 유럽 최상위 리그에 몸담은 외국인 감독들의 이력을 그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전력강화위원회 위원들의 토론을 거쳐 추천해야 하는 절차를 건너뛰고 이임생 위원장 혼자서 판단을 끝냈다. “KFA 법률 검토상 법적 문제는 없다”라고 말했다. 7월8일 박주호 전 전력강화위원은 자신의 유튜브에서 홍 감독 선임 결정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며 “지난 5개월간 뭘 했는지 모르겠다. 허무하다”라고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허술한 선임 과정은 홍명보 감독의 가장 큰 덕목으로 꼽혔던 ‘기강’을 흔든다. 이미 몇몇 언론과 유튜버들은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신임 감독 선임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이임생 위원장은 정몽규 KFA 회장을 대신한 ‘총알받이’라고 조롱받는다. “나는 나를 버렸다” “두려웠지만 내 안에 있는 무언가 나왔다”라는 홍명보 감독의 기자회견은 온라인상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이 환경 탓에 SNS를 즐기고 ‘2002 월드컵 세대’에 대한 동경이 옅은 대표팀 선수들에게 영이 서지 않게 되었다. 홍명보 선임은 기강을 잡기 위해 기강을 해친 한국 축구사의 역설적인 사례가 되었다. KFA 설명을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하더라도 그렇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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