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슐랭]① 한국 최초의 기업 박물관, 한독의약박물관
보물 6점, 독일 현지 약국 유물 재현 등 볼거리
서울 마곡에 서울 특별관, 소장품 순회 전시
<미슐랭(미쉐린) 가이드는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레스토랑 평가·안내서입니다. 조선비즈는 미슐랭 가이드처럼 국내 기업과 기관이 운영하는 과학관과 박물관의 콘텐츠 ‘맛’을 평가하는 과슐랭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과학관, 박물관에 담긴 과학 정보와 함께 기업 직원들이 추천하는 근처의 맛집도 소개합니다. 과학과 문화를 배우며 맛집도 찾는 여행 가이드로 활용하길 바랍니다.>
언제나 최초라는 타이틀은 글자 이상의 막중한 무게감이 있다. 한독의약박물관이 어느 곳보다 울림이 큰 것도 대한민국 최초의 기업 박물관이자 최초의 전문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창업주가 평생 공들여 수집한 전 세계의 의·약학 유물을 통해 의·약 산업의 역사를 둘러볼 수 있다.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충북 음성에서 진천 구간을 달리다 보면 고속도로 바로 옆에 한독의약박물관이라는 큰 간판이 눈에 띈다. 대소 톨게이트로 나오면 박물관까지 5분 정도 걸린다. 한독의약박물관은 지난 1964년 세워진 대한민국 최초의 기업박물관이자 전문 박물관이다. 한독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창업주인 고(故) 김신권 전 명예회장이 설립했다.
한독에 따르면 김신권 회장은 생전 선진 제약산업을 배우러 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약학박물관을 보고 한국에도 의·약학 전문 박물관을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김 회장은 직접 초대 박물관장을 맡아 유물들을 수집·관리하면서 박물관의 초석을 다졌다.
◇한독 창업주가 직접 유물 수집, 관리
관람은 2층 한국전시실부터 시작한다. 영롱한 옥색으로 빛나는 보물 646호 ‘청자상감상약국명합’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상감 기법으로 만든 청자 합(盒·뚜껑 달린 원통형 그릇)에 ‘상약국(尙藥局)’이라는 이름이 적혀있다는 뜻이다. 상약국은 고려시대의 궁중 의료기관으로, 이 유물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기록으로만 남아있어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전시실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야 한약재를 조제·보관·투여하는 순서대로 관람할 수 있다. 우선 채집된 약재를 갈거나 빻는 데 사용하는 약연·약맷돌·약절구 등의 약연기가 나온다. 약연기는 금속으로 만들면 약재와 금속의 화학반응에 의해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곱돌 소재를 쓴 유물이 많다.
특히 약재를 달이는 데 쓰는 약탕기의 경우, 약재에 함유된 성분이 구리나 철과 닿으면 독성 물질로 변하기 쉽다. 또 구리나 철의 녹이 약재에 스며들면 두통·복통·구토 등을 일으킬 수 있다. 항균 효과가 있는 은(銀)으로 만든 약탕기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은도 귀금속이라 일반인들이 은으로 된 약탕기를 구비하기는 힘들었다. 은 재질 대신 이용한 것이 곱돌이다. 비교적 구하기 쉬운 각섬석을 가공한 곱돌은 열전도율이 낮아 오래도록 끓이거나 삶아도 내용물이 잘 타지 않기 때문에 보약을 달이는 기구로 유용했다.
한국전시실에는 향약제생집성방(보물 1235호), 의방유취(보물 1234호), 언해태산집요(보물 1088호), 찬도방론맥결집성(보물 1111호) 등 고의서들이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또 근대 의·약학 도입 이후 유물로는 경성의대 졸업증서, 세브란스 교과서 등 주요 의학 교육기관 관련 유물과 백보환·활명수·안티푸라민 등 근대 약품 관련 유물이 밀도 있게 전시됐다. 한국의 근대적 의·약학이 단기간에 급속히 성장한 것을 상징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동·서양 아우르는 의약 유물 총집합
한국전시실 중앙의 계단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국제전시실에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유물들이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전시실 중앙의 독일 약국 모형이다. 독일어로 ‘사자 약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모형은 마네킹과 책상을 제외하곤 모두 독일의 실제 근대 약국 유물들로 꾸며졌다. 김신권 회장이 1960년대 독일 현지에서 직접 수집한 컨테이너 6개 분량의 유물들을 독일 약국에 모았다. 한독의 상징이자 모형 약국의 이름인 ‘사자’는 김신권 회장이 사자상(相)이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 있다.
서양 유물들은 대부분 근대 초기 의약 기구들이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건 박물관이 폭넓게 수집한 동·서양 보청기들이다. 보청기는 청력에 약해진 사람을 위해 소리 에너지를 모으고 증폭하는 장치다.
17세기에 처음 등장한 보청기는 증폭 기능 없이 단순히 소리를 수집하는 형태이다. 기다란 원뿔 모양으로 바깥소리를 모아 귓속 깊숙이 전달하는 원리이다. 20세기 초반에는 탄소 보청기가 부상했다. 탄소 입자가 있는 동판이 소리에 움직이면 탄소 밀도도 변해 소리 에너지를 전달하는 초기 전화기의 원리를 보청기에 적용한 것이다. 이에 소리를 어느 정도 증폭할 수 있었지만, 일정 거리 밖에서는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탄소 보청기 다음으로는 진공관 보청기가 등장했다. 배터리를 연결한 진공관이 소리 에너지를 증폭하는 원리다. 크고 무겁기는 했으나 탄소 보청기에 비해 소리가 더 뚜렷이 들리고 잡음은 줄어들었다. 트랜지스터와 저전압 배터리를 이용해 진공관 보청기의 크기를 줄인 것이 집적회로 보청기다. 트랜지스터가 발달하면서 점점 더 작아지고 주파수 범위는 넓어져 소리가 부드럽게 들렸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완벽히 디지털화된 디지털 보청기가 나타났다. 디지털 방식으로 신호를 제어해 소음 제거, 방향성, 피드백 제어 등의 기능도 가능해졌다.
국제전시실의 구석에는 한독이 판매했던 약과 실제로 약을 생산하던 기계들을 전시한 한독 역사실이 있다. 역사실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은 편인데, 홍보관이 아닌 박물관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김신권 회장의 유지가 녹아있다. 1층 출입구 쪽에는 어린이들이 조선시대 내의복과 의녀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마련돼있다. 국제전시실을 나서면 정면에 청자나 백자 등 의·약 외 기타 유물들이 마련된 제석홀이 있다.
◇서울 마곡에도 ‘작은 박물관’…체험프로그램 예정
한독의약박물관은 유물 전시나 설명도 알차지만, 교육·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유아부터 성인까지 약과 한약의 원리를 배우고 직접 체험하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방 탈출과 같은 놀이 방식의 교육 프로그램도 있어 어린이들도 흥미를 끌어내기 쉽다. 박물관 홈페이지를 참고해 프로그램을 예약하면 된다.
또 5인 이상 단체 방문 시 예약하면 한독의 공장도 직접 견학할 수 있다. 생산 규모로 국내 5위권인 한독 공장은 박물관 바로 옆에 있다. 지난 1995년 음성에 공장을 새로 지을 당시 처음부터 견학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모든 공정을 다 볼 수는 없지만, 알약과 파스를 만드는 주요 공정을 관계자의 설명과 함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박물관 맞은편에는 약초 온실을 개조한 팩토리 투어센터가 있다. 커피와 차류를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어 관람 후 여유롭게 쉬어가기 좋다.
박물관 자체는 소장품이든 연계 프로그램이든 상당히 알차지만, 인근에 같이 둘러볼 관광지가 다소 부족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식당 역시 차로 10여 분 거리의 진천군 광혜원면까지 나가야 볼 수 있다. 박물관 직원들은 진한 국물의 황태해장국을 자랑하는 광명해장국과 돼지갈비·한우 등을 파는 선수촌 한우정육식당을 추천한다.
한독은 박물관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점을고려해 2022년부터 서울 강서구 마곡동 한독 퓨처콤플렉스에 ‘한독의약박물관 서울’을 개관했다. 9호선·공항철도 마곡나루역 바로 앞에 있는 서울관은 단독 건물은 아니지만 1층 한 켠에 알차게 꾸며졌다. 상설 전시관 80점, 특별전시관 80점 등 모두 160점을 음성관에서 가져와 전시한다. 특별전시관 80점은 주기적으로 음성관의 다른 소장품들과 교체해 전시한다.
서울 상설관은 음성관처럼 약재를 처리하고 조제한 후 환자에게 전달하는 순서대로 소장품을 전시한다. 전시품 중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부인이었던 이방자 여사가 사용했던 약통도 있다. 전시된 약병은 초록색·파란색 유리병이 많다. 근대 약국은 약을 직접 조제·병입(甁入)해 판매했는데, 변질을 막기 위해 자외선 차단율이 높은 녹색·파란색의 유리병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8월부터는 이 같은 해설을 들을 수 있는 QR코드도 추가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독이 판매했던 약품과 회사 광고들도 시대별로 모아 제공한다.
앞으로 퓨처콤플렉스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자원봉사 개념으로 주말에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서울관은 서울 서부의 명소가 된 서울식물원이 바로 옆에 있고, 인근에는 겸재정선미술관이나 허준박물관도 있어 함께 갈 만하다. 직원들은 마곡나루역 주변의 ‘마부자 생삼겹살’이 김치 삼겹살로 유명하다고 했다.
음성박물관 과슐랭 별점
자체 콘텐츠(3/3) ★★★ 소장 전시품의 양과 질, 교육 프로그램까지 모두 만점!
주변 연계(0.5/2) ☆ 음성군에서 인근 산업단지와 엮은 여행 프로그램의 중심지
전체 평가(3.5/5) ★★★☆ 나무랄 데 없는 박물관, 주변에 볼거리만 더 많으면 금상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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