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각시’인줄 알았더니… 1년새 망친 논, 축구장 7050개 크기
지난 25일 오전 전남 해남군 문내면 용암리의 한 논. 벼가 한창 빽빽하게 자라고 있어야 할 논 곳곳이 태풍이 쓸고 지나간 듯 휑했다. “논 꼬라지 보소. 4㏊ 중 1㏊가 증발해부렀어요. 속상해 죽겠당게요.”
농민 김수경(46)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논바닥을 보니 어른 엄지손가락만 한 왕우렁이가 득실했다. 김씨는 “왕우렁이가 어린 모를 먹어치워 약을 뿌리고 여러번 모내기를 했는데도 이 모양”이라며 “왕우렁이가 이렇게 번창한 건 생전 처음 본다”고 했다.
근처 강진군 논에서는 농민과 농협 직원 등 5명이 허리를 숙이고 왕우렁이를 건져내고 있었다. 10분 만에 30㎝ 크기의 수거망이 왕우렁이로 가득 찼다. 이들은 “착한 줄만 알았던 왕우렁이가 이렇게 속을 썩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우리나라 최대 곡창인 전남에서 왕우렁이 퇴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친환경 농업의 대명사인 왕우렁이가 올해 폭증하면서 잡초뿐 아니라 모까지 먹어치우고 있기 때문이다.
28일 전남도에 따르면, 올 여름 왕우렁이 피해를 본 지역은 강진, 고흥, 해남, 장흥 등 9군 5034㏊에 달한다. 축구장 7050개 크기다. 작년만 해도 피해 면적이 3.1㏊였는데 1년 새 1623배가 됐다. 전남도에는 비상이 걸렸다. 유덕규 전남도 친환경농업과장은 “이렇게 광범위하게 피해가 발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7월 한 달을 왕우렁이 포획 기간으로 정하고 5억2000만원을 들여 살충제를 긴급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전남도는 올봄 어린 왕우렁이를 보급하는 데 40억원을 썼는데 포획 비용까지 추가로 들게 된 것이다.
왕우렁이의 ‘습격’은 날씨 탓이 크다. 지난겨울 이례적으로 따뜻했던 데다 비도 자주 오면서 얼어 죽어야 할 왕우렁이가 살아남아 계속 번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기상청에 따르면, 작년 12월부터 올 2월까지 전남 지역의 평균기온은 영상 5.1도로 역대 가장 높았다. 여기에 비까지 많이 왔다. 겨울철 37일간 총 239.5㎜ 비가 내려 강수일과 강수량 모두 기록을 세웠다. 전남도 관계자는 “비가 자주 내려 겨울에도 논바닥이 물에 잠겼고 날씨도 온화해 무더운 남미산인 왕우렁이가 무사히 겨울을 났다”고 말했다.
정부는 2019년 ‘왕우렁이 관리 지침’을 만들어 잡초 제거 임무를 마친 왕우렁이를 포획하도록 했는데 농가들이 이를 소홀히 한 측면도 있다. 이에 농민들은 “번식력이 대단해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다” “배수로를 기어서 (친환경 농업을 하지 않는) 다른 논으로도 퍼지고 있다”고 했다. 농민 박모(54)씨는 “왕우렁이 한 마리가 알을 낳으면 일주일 뒤 수백~수천마리가 부화한다”며 “성장 속도도 빨라 두 달이면 4~5㎝ 크기로 자란다”고 했다.
왕우렁이 농법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명희 전남도의회 의원은 “친환경 농업을 위해 도입한 우렁이 때문에 또 다른 농약을 쓰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며 “기후변화에 따라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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