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천 칼럼]정태인, 먼 길 떠난 이가 보낸 선물
예쁜 보자기에 담긴 정태인 1주기 추모 기념 책자를 받았다. 보자기로 싼 책 자체가 기쁜 선물이지만 더 큰 선물은 책 속에 담긴 보석 같은 내용과 메시지였다. 누구보다 고인과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정건화, 김병권, 이상헌이 각각 <정태인의 미래키워드>의 발간사, 들어가는 말, 나오는 말을 썼는데 내용이 절절하다. 이 안내글에서 벗들은 고인을 헌신적으로 현장을 지향한 실천적 연구자이자 제2의 박현채, 과거 아닌 미래와 씨름했던 선구적 지식인, 시대를 따라 공부하다 떠난 정책연구자로 부른다.
정태인은 무엇을 남겼나. 고인의 유산을 살려내기 위해 가장 깊이 고민했을 편집자들은 정태인의 미래키워드를 기후위기와 생태적 전환, 사회적 경제, 동북아와 한반도평화의 세 가지로 잡고 관련된 유고를 수록했다. 책에는 세 키워드에 맞춰 진행한 추모포럼 발표와 토론문도 함께 실려 있다. 사실 한 사람이 한 가지만 제대로 하기도 벅찬데 고인은 힘겹게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씨름해왔다. 혹시 주제가 넓어 깊이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사회적 경제와 생태적 전환 주제에 매진하는 가운데서도 고인은 생애 말기에 ‘북한경제의 개혁방향 탐색’을 주제로 박사학위까지 한 사람이다. 몸에 고장이 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다.
짧은 지면에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해 세세하게 언급할 수는 없다. 그가 남긴 ‘협동의 경제학’이 오래 이야기될 것이다. 주류경제학이 이기심과 경쟁에 기반한다면 이 새로운 대안경제학은 상호성, 신뢰와 협동에 기반을 둔다. 새 경제학은 시장일변도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시장경제로 짜인 네 박자로 굴러간다. 사회적 경제나 커먼즈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있지만 성공적 작동방식에 대한 논의는 적다. 협동의 경제학은 이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담고 있다. 새 경제학은 다중심적 접근을 취하면서 사회적 경제나 커먼즈 일변도가 아니라 재분배와 산업 정책에서 시장을 재구성하는 강력한 국가 역할도 중시한다. 생태적 전환전략에서도 탈성장론에 한편 공감하면서도 다양한 시각을 ‘적절하게 결합’하는 진보적 실용주의 관점을 취하며 생태적 혁신과 투자에서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다.
다음으로, 정태인이 존경하고 사랑한 두 거장, 박현채와 폴라니의 재생을 위해 고인이 남긴 생각을 불러내 유고집에 약간 보태고 싶다. 고인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결함과 함께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가 제시한 글로벌시대 ‘개방된 민족경제론’의 방향은 세 가지다(https://www.vop.co.kr/A00000247136.html). 첫째, 자립적 재생산 구조의 재해석인데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을 살리고 이에 기반해 국내 산업연관, 일자리, 투자를 해결하는 방향이다. 둘째, 민중의 생활상 요구의 확장방향인데 우리 삶의 필수적 공공성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 국내 소비를 진작시키는 것이다. 셋째, 민족적 생활양식을 재해석해 풀뿌리 지역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는 성장과 복지, 일자리, 미래산업의 요람이고 민주주의의 토대다. 이리하여 호혜, 공공성, 시장의 세 층위가 조화를 이루게 해야 한다.
폴라니와 관련해 고인이 남긴 글로는 “폴라니와 다원적 발전이론-칼 폴라니 사상의 현대사회과학이론으로의 재기술”(2015)이 중요하다. 여기서 피력한 고인의 생각은 이러하다. 폴라니와 그람시의 비판적 종합에 기반한 뷰러웨이의 사회중심 사회주의,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 기획은 현대 폴라니주의와 같은 방향을 향한다. 라이트는 제도적 다원주의와 이질성을 주장하고 있어 폴라니 다원적 발전론의 재구성을 위한 귀중한 이론적 자원이다. 폴라니는 사회통합양식으로 상호성, 재분배, 교환을 제시했는데 이를 경제민주주의로 풀어보면 사회적 경제, 공공경제, 시장경제의 세 가지 축이 된다. 거시경제 메커니즘의 해명은 폴라니에서 공백 상태인데 이는 포스트케인지언 거시경제학(소득주도성장론)으로 보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인이 사랑한 박현채와 폴라니 사이에 어떤 공통점은 없을까. 고인의 유고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사회적 실체로서 노동과 토지, 시초축적, 공동체의 해체와 재생, 불평등과 생태위기의 통합적 인식 등에서 뜻밖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 경제사상안의 어떤 보편성 논의가 될 수도 있을 법한데, 이 또한 자기 사명에 지극히 충실하게 살다가 일찍 먼 길을 떠난 천재적 개혁정책가가 보낸 선물이 아닌가 한다.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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