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순봉의 음악이야기] 롯시니

하순봉 작곡가 2024. 7.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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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인들에게 오페라는 가장 발전된 예술 형태였고 가장 큰 여흥거리였다.

이탈리아가 주도하는 이 벨칸토오페라에는 롯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세 작곡가가 있었고 그 정상에는 조아키노 롯시니(1792~1868)가 있었다.

롯시니는 14세에 첫 오페라를 작곡했고 24세에 '세비야의 이발사'를 발표하며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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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순봉 작곡가

18세기 유럽인들에게 오페라는 가장 발전된 예술 형태였고 가장 큰 여흥거리였다. 사람들은 영국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지속돼온 ‘비극적 오페라’대신 보다 가벼운 음악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페라 부파(희가극)는 이렇게 시대적 욕구에 의해 탄생되었다.

조아키노 롯시니


이탈리아가 주도하는 이 벨칸토오페라에는 롯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세 작곡가가 있었고 그 정상에는 조아키노 롯시니(1792~1868)가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극장들은 흥행을 위해 작품의 빠른 회전을 요구했으며 한 달만에 새 작품이 무대에 오를 정도였다. 당연히 작곡은 며칠만에 끝나야 했다. 롯시니가 ‘세비야의 이발사’를 13일 만에 작곡했을 때 도니제티는 “롯시니는 게으르군”이라고 농을 쳤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의 묘약’을 8일 만에 작곡했기 때문이다. 이런 빠른 속필은 당시 작곡가들의 재능을 은근히 과시하고 비교하는 풍조가 될 정도였다.

문제는 졸속이다. 당연히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고 작곡가들은 자기표절이 많고 대부분의 작품이 인쇄는 커녕 초연이 바로 종연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 다른 문제는 오로지 청중을 즐겁게 하는 것이 목적인 이 오페라에서 작품보다 가수들의 기교가 우선이 됐다는 것이다. 악보대로 노래부르지 않는 이런 풍조를 베를리오즈, 멘델스존 등 많은 음악가가 비판했고 당연히 롯시니도 가수들의 그런 행태를 크게 우려했다.

롯시니는 14세에 첫 오페라를 작곡했고 24세에 ‘세비야의 이발사’를 발표하며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그 인기는 전 유럽에 롯시니의 광풍이 불 정도였다. 평생 39편의 오페라를 작곡한 그는 37세에 ‘빌헬름 텔’을 마지막으로 남은 여생의 39년간을 더 이상 오페라를 쓰지 않았다. 이것은 수많은 억측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이미 롯시니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경계심과 우려를 나타냈었고 자신의 음악이 충분히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는 것을 토로한 바 있다.

1860년 파리로 바그너가 노년의 롯시니를 방문한다. 그 대담에서 롯시니는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매년 3, 4편의 오페라를 작곡해야 했다. 나는 속필이고 감수성은 있지만 기초가 부족하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악보를 베껴쓰며 관현악을 공부했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했었으면 더 좋은 작품을 작곡할 수 있었을 거다”고 말한다. 롯시니는 이렇게 재능만 믿지 않고 성실히 공부하는 작곡가였다. 그래서 한때는 그의 음악이 독일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지만 롯시니는 특유의 익살과 기발한 선율, 그리고 악기의 효과를 가장 극대화한 단순명쾌한 관현악법, 튼튼한 구성 등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소위 ‘롯시니 크레센도’라고 하는 관현악의 악기를 점점 더해가며 절정으로 음악을 고조시키는 특유의 관현악법은 유명하다. 슈베르트도 이 수법을 모방했다고 한다.

그는 또 식도락으로 유명하다. 파리에서는 당대의 명사들을 초대해 직접 본인이 요리한 음식을 대접하는 걸 즐겨 하기도 했고 요리 개발에도 관심을 가져 지금도 롯시니의 이름을 딴 요리가 남아 있다. 밀라노에 자신의 기념비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그 돈을 나한테 주면 내가 대신 그 자리에 서있겠는데…”라고 했다고 하니 평소 그의 익살도 대단하다. 또 빈에서는 자신이 존경한 베토벤의 연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보였다.

베토벤도 작품 초연의 장소를 롯시니를 피해 다른 장소로 바꿀 정도로 최고의 인기 작곡가였던 롯시니! 그는 소위 음악으로 구원을 바라는 그런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의 음악에는 품위있는 유머와 재치가 있고 한없이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기욤 텔 서곡, 세비야의 이발사 서곡, 아리아 ‘나는 이 거리의 만물박사’들을 들어보시라! 이 여름의 무더위가 싹 가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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