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화부터 기개 있게 브라질리언 왁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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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별로 꺼내놓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유치원생일 적에도 유아기 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한다는 대소변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당연하게 겪게 되는 몸의 변화, 월경과 2차 성징 같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과 거리낌 없이 나누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스물한 살이 된 지금, 나는 잘 보던 만화나 책에서 서슴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인물이 나오면 쑥스러워하며 책을 덮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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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별로 꺼내놓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고백건대, 나는 ‘청결한 이미지’에 약간의 집착이 있다. 인간으로서 누구나 하는 당연한 생식,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터부시된 일들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마음이 남들보다 조금 더 크다. 유치원생일 적에도 유아기 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한다는 대소변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당연하게 겪게 되는 몸의 변화, 월경과 2차 성징 같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과 거리낌 없이 나누는 일도 거의 없었다. 주로 책에서 접한 정보로 대개의 일을 해결했다. 그리고 스물한 살이 된 지금, 나는 잘 보던 만화나 책에서 서슴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인물이 나오면 쑥스러워하며 책을 덮지 않게 됐다. 오히려 흥미롭고 통쾌하게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런 마음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웹툰이 있다. 바로 쌉초 작가의 <쌉초의 난>이다.
<쌉초의 난>은 1화부터 기개 있게 출사표를 던진다. 1화의 제목은 ‘브라질리언 왁싱’이다. 주인공 쌉초는 심심하던 차에 브라질리언 왁싱을 접하게 되고 ‘거쉭이가 생닭 같아져서 생리할 때 편하다’는 가감 없는 친구의 말에 셀프 브라질리언 왁싱을 시도한다. 오랫동안 웹툰을 봐온 독자인 나는 ‘도대체 이 주제를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거지?’라는 의문을 갖고 컷툰(한컷 한컷 옆으로 넘겨 보는 웹툰) 페이지를 넘기고, 사실적인 구도에 초록색 수풀로 표현돼 나온 ‘거쉭털’의 모습에 포복절도한다. 한올 한올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이 그림에서 얼마든지 적나라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감과 재미를 더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표정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왁스를 떼려다가 엄청난 통증과 마주하게 된 쌉초의 표정은 굵은 선과 사실적인 색깔로 묘사됐다. 이 컷에서 나는 화면을 뚫고 나와 세포를 일깨우는 통증을 마주하고 절로 얼굴을 찡그린다.
강렬한 첫 화를 남긴 <쌉초의 난>은 주인공의 일상을 가식 없이 드러내며 높은 인기를 얻었다. 많은 독자에게 작가와 동일시되는 주인공 쌉초는 2030 여성으로, 이토록 솔직한 만화의 주인공이 젊은 여성인 것만으로도 여성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압박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여자에게도 수염이 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수염을 탈색하거나 면도하며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거친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폭로해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더럽고 깨끗하고, 때론 무례하고 또다시 예의 바르고, 상냥하면서도 장난기 많은 ‘보통의 인간’인 쌉초에게 공감하고 열광한다.
작가의 노골적이고도 유머러스한 묘사는 수천 년의 역사를 살아왔음에도 솔직해지지 못해서 여러 정확한 정보와 교류의 기회를 놓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특히 여자들에게 ‘양반으로서의 체면을 모두 놓아두고 조금 더 솔직해지자. 내가 그 선두에 설게’라고 말하는 듯하다. 솔직히 말해서 여전히 포기하기 어려운, 관리하려는 ‘이미지’가 아직도 내게 존재한다. 그러나 영원할 것처럼 견고한 전통적 금기도, 친구에게 건네는 “나 <쌉초의 난> 재미있게 봐”라는 한마디로 실금이 가고, 그 까마득한 높이가 조금 낮아진 것처럼 보인다. 진솔한 개인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써 아주 많은 사람에게 공감과 안심을 불러일으킨 쌉초에게 웃음과 지지를.
신채윤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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