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존재들의 공장 [한겨레 프리즘]
방준호 | 이슈팀장
경기 화성 리튬전지 폭발 참사(아리셀 참사)가 벌어지고 이어진 추모 발언을 살피다가, 전수경 노동건강연대 활동가의 말(7월9일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 추모행동’)에 눈이 머물렀다. 그는 참사 앞에, 2016년 휴대전화 부품을 만드는 하청 공장에서 벌어진 ‘메탄올 중독 실명 사고’를 떠올렸다고 한다.
“옆자리에서 일하던 사람을 내일 다시 볼지 알 수 없기에 인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몸이 안 좋아지면 약국에서 약 사 먹고, 집에서 못 나와도 내 소식을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메탄올 실명’ 노동자들은 실명의 이유를 알기까지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인력 업체를 통해 대기업 휴대전화 부품을 만드는 제조업 3차 하청업체에 불법 파견된 노동자’라는, 모호한 존재인 채로 지금 눈앞에 뿌려지는 액체가 무엇인지 물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회용 마스크와 목장갑만 주는 회사에 법대로 보안경과 호흡용 보호구를 달라고 할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뭔가 이상해”, 마찬가지로 모호한 처지인 동료와 소곤대다가 함께 이야기해보자고 의기투합할 여유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 액체, 메탄올에 중독돼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을 때조차 대체 이게 무슨 일이며, 누구의 책임인지 알 수 없어 더 큰 공포에 짓눌렸을 것이다.
메탄올 실명 사고로부터 8년, 아리셀 참사가 벌어지고 한달여가 흐른 지난 19일 아침 고나린 기자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인력사무소에서부터 공장까지 나의 신상정보를 아무도 안 물어보는데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한테 어떻게 일을 바로 시키는 건지 궁금.’ 이날 아리셀 참사 희생자들처럼 화성의 한 인력사무소에서 일용직 일자리를 구한 고 기자는 여성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승합차에 올라 공장으로 향하고 있었다.(한겨레 7월24일치 ‘안전교육에 달랑 1분 대피로도 알 수 없었다’) 주민등록증을 깜박했는데, 신원을 확인하려 드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이름과 나이 정도의 존재감도 없는 흐릿한 노동자인 채 고 기자는 공장에서 ‘발바닥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일했다. 전문가는 이를 ‘유령 노동’이라고 표현했는데, 곁의 이주노동자들은 이 상황을 익숙하게 여기는 듯했다. 존재감 없는 노동자의 안전을 신경쓰는 관리자는 없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손짓발짓하며 서로 챙기고 도왔으나, 그 이상 서로의 존재를 묻고 안녕을 챙겨줄 여유는 노동자에게 또한 없었다.
그렇게 적힌 산업단지 일용직 체험 기사가 보도되고, 고용노동부는 보도설명자료를 냈다. ‘(정부가 역점을 둔 위험성 평가는) 사업장 특성을 가장 잘 아는 노사가 위험요인 발굴·개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진하는 제도’라고 적혀 있었다. 그 합리성을 부정할 수 없다. 전국 곳곳 수많은 사업장 위험을 정부가 일일이 감시하고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노사 대화에 기반을 둔 자율적인 안전 관리는 좀 더 선진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제도가 상정한 대로 목소리 낼 수 있는 노동자가 ‘존재’하는, 상식적인 일터라면.
상식적인 일터는 외려 멀어지고 있다. 한때 한국 산업의 동력이자 노동자 연대의 바탕으로 여겼던 산업단지는 이제 이주노동자 중심의 일터다. 우후죽순 산업단지가 생겨난 화성 서남부 일대에서 이주민 비율이 30% 가까운 읍·면·동은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일용직으로, 미등록 상태로 이 공장 저 공장 떠도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합은커녕 서로의 이름조차 모른 채 하루 일하고 흩어진다. 모여서 목소리 낼 힘이 없다. 언론도, 정부도, 사업자도, 노동자 스스로조차 놓여 있는 위험을 주목하지 못한다. 존재는 참사를 통해 잠시 드러난다. 이내 잊힌다.
전근대로 돌아간 것 같은 노동관계가 대세가 되어버린 공장을 두고, 세련된 안전관리 체계를 이야기하는 일이 문득 무망했다. 지난 27일 아리셀 참사 유가족들은 희생자 영정을 들고 서울 용산 대통령실로 향했다. 희생자 이름과 얼굴이, 뒤늦게 선명했다. 최첨단 빌딩이 즐비한 서울 하늘에선 비가 세차게 퍼부었다.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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