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승첩 장수들 승급…최고 수훈 이순신에겐 야박한 포상
- 선조, 벼슬 높다며 예우 안해
- 공 세운 대가는 은자 20냥뿐
- 전력 증강이 최우선이라 여겨
- 동짓날 매서운 추위 건뎌가며
- 고하도로 이진 수군 재건 작업
10월27일[12월5일] 맑음.
영광군수(전협)의 아들 전득우(田得雨)가 군관이 되어 인사하러 왔기에 그를 바로 부친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었다. 그는 홍시 100개를 가져왔다. 밤에 비가 뿌렸다.
10월28일[12월6일] 맑음.
아침에 여러 가지 장계를 봉하여 피은세에게 주어서 보냈다. 늦게 강막지의 집에서 나와 지휘선으로 옮겨 탔다. 저녁에 염장(鹽場, 염전)의 도서원(都書員) 거질산이 큰 사슴을 잡아 바치기에 군관들에게 주어 나누어 먹게 했다. 이날 밤에는 바람 한 점 일지 않았다.
10월29일[12월7일] 맑음.
날이 거의 샐 무렵 첫 나팔에 배를 띄워 목포로 향하였다.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동풍이 약간 불었다. 목포에 이르러 보화도(寶花島)에 배를 댄 즉, 서북풍을 막아주고 배를 감추기에 매우 적합했다. 그래서 육지에 올라가서 섬 안을 돌아보니, 지형이 그럴듯하므로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 여기 목포 고하도에서 본격적으로 수군 재건에 착수하며 정유년 겨울을 보낸다. 여기서 어느 정도 군비를 확충하자 이듬해 2월16일 적의 진지에 가까운 고금도로 다시 진을 옮긴다.
10월30일[12월8일]
맑으나 동풍이 불고 비 올 조짐이 많았다. 아침에 집 지을 곳에 내려가 앉았자니 여러 장수가 보러 왔다. 해남현감(유형)도 와서 적에게 붙었던 자들이 한 짓을 전했다. 일찍, 황득중을 시켜 목수를 데리고 섬 북쪽 산 밑에 가서 집 지을 재목을 찍어 오게 했다. 늦게, 적에게 붙었던 해남의 정은부와 김신웅의 계집과 왜놈을 꼬드겨 우리나라 사람을 죽이도록 시킨 자 2명과 양가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을 모두 목 베어 효시하였다. 저녁에 양밀(梁謐)이 도양장의 곡식을 제멋대로 나누어 주었기에 곤장 60대를 쳤다.
▶정유년(1597년) 11월
안편도에서 목포 앞 고하도로 이진하고 수군 재건 작업에 본격 착수한다. 입을 것 먹을 것 모두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동짓달 매서운 추위를 견뎌가며 백성의 도움으로 군자금을 마련하고, 나무 찍어 집 짓고, 선착장 다리 놓고, 배 만들며 하루도 그에게 쉴 날은 없었다. 전력 증강만이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을 유일한 길이니 날씨가 아무리 춥고 주거할 곳조차 마땅치 않아도 어찌 하룬들 쉴 수 있었겠는가. 그 가운데 왕은 명량승첩에 참전한 다른 장수들은 벼슬을 높여 포상하면서도 유독 수공자(首功者) 이순신만은 사소한 적을 잡은 데 불과하다며 은량 몇 푼만 줄 뿐 포상하지 않는다. 그래도 제해권을 되찾아 나라를 살려냈으니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11월1일[12월9일] 비, 비.
아침에 모녹피(毛鹿皮) 2장이 물에 떠내려 왔기에 곧 이리로 온다는 명나라 장수에게 선물로 주고자 보관해 두었다. 이상한 일이다(명나라 장수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귀한 모녹피 2장이 떠내려온 것이 이상하다는 말이다). 오후 2시께 비는 갰으나 북풍이 크게 불어 뱃사람들은 추위를 견디기 어려웠다. 나도 선실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노라니, 심사가 편치 않았고 하루를 지내는 것이 일 년 같았다.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 하랴. 저녁에 북풍이 크게 불어 밤새도록 배가 흔들리니 사람이 안정할 수 없었다. 땀이 나서 온몸을 적셨다.
11월2일[12월10일]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일찍 들으니 “전라 우수사(김억추)의 전선이 바람에 떠내려가다가 바위에 걸려 부서졌다”고 한다. 매우 통분한 일이다. 그 전선 군관 당언량(唐彦良)에게 곤장 80대를 쳤다. 선창에 내려가 앉아서 선착장 다리 놓는 것을 감독했다. 그 길로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어두워서 배로 내려왔다.
11월3일[12월11일] 맑음.
일찍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가니 선전관 이길원(李吉元)이 배설을 처단할 일로 들어왔다. 배설은 이미 성주(星州) 본가로 갔는데, 그리로 가지 않고 곧장 이리로 왔으니 그 사정(私情)을 보아주는 죄가 크다. 선전관에게 녹도의 배를 보냈다.
11월4일[12월12일] 맑음.
일찍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 선전관 이길원이 떠나지 않았다. 진도 군수 선의문이 왔다.
11월5일[12월13일] 맑음.
따뜻하기가 봄날과 같다. 일찍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배로 내려왔다. 영암군수 이종성이 와서 밥 30말을 지어 일하는 군인들에게 먹였고 또 군량미 200섬을 준비하고, 벼(中租) 700섬도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날 보성군수(반흔)와 흥양현감(최희량)에게 군량을 둘 곳간 짓는 것을 살펴보게 했다.
11월6일[12월14일] 맑음.
일찍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가 종일 서성거리다가 해가 저무는 것도 몰랐다. 새 집에 지붕을 덮고 군량곳간도 지었다. 전라우수영의 우후(이정충)가 벌목해 오려고 황원장(黃原場)으로 갔다.
11월7일[12월15일]
맑고도 따뜻했다. 아침에 해남 의병이 왜인 머리 1급과 환도 한 자루를 가져와 바쳤다. 이종호가 당언국(唐彦國)을 잡아 왔기에 거제의 배에 가뒀다. 늦게 전 홍산현감 윤영현과 생원 최집이 보러 와서 군량으로 벼 40섬과 쌀 8섬을 바쳤다. 며칠 간의 양식으로 도움이 될 만하다. 본영의 박주생이 왜인 머리 2급을 베어 왔다. 전 현령 김응인이 와서 만났다. 이대진의 아들 순생(順生)이 윤영현을 따라왔다. 저녁에 새 집 마루를 다 놓았다, 우수사(김억추)가 와서 만났다. 이날 밤 꿈에 면이 죽는 모습이 보여 슬피 울다가 깨었다. 진도군수(선의문)가 돌아갔다.
11월8일[12월16일] 맑음.
새벽 3시께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 꿈을 꾸었다. 이날은 따뜻하고 바람이 없었다. 새 방 벽에 흙을 발랐다. 이지화(李至和) 부자가 와서 만났다. 마루를 만들었다.
11월9일[12월17일]
맑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우수사(김억추)가 와서 만나고 강진 현감은 자기 고을로 돌아갔다.
11월10일[12월18일]
눈, 비가 섞여 내리고 서북풍이 크게 일어 간신히 배를 구호했다. 이정충이 와서 장흥에 있던 적들이 물러갔다고 하였다.
11월11일[12월19일]
맑고 바람도 약해졌다. 열흘 남짓 만에 새 집을 지었다. 식후에 새 집에 올라가니 평산(平山)의 새 만호가 도임장을 바쳤는데 그는 하동현감(신진)의 형 신훤(申萱)이다. 전하는 말에 나를 “숭정대부(崇政大夫,종1품)로 포상하여 가자(加資, 승급)하라는 명령이 이미 나왔다”고 한다. 장흥부사(전봉)와 조방장 배흥립이 와서 만났다. 저녁에 우후 이정충이 왔다가 오후 8시경에 돌아갔다.
*** 조정에서는 명량대첩에 대한 포상으로 이순신을 숭정대부(종1품)로 승급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되었고 그 소식이 이순신에게 미리 전해진 듯하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의 벼슬이 이미 높다하여 승급시키지 않는다. 이순신은 한산대첩으로 정헌대부(정2품)로 승급한 이후 부산대첩에서도 승급하지 못했고, 이번 명량승첩을 거두고도 승급하지 못해 결국 죽을 때까지 승급하지 못한다.
11월12일[12월20일] 맑음.
이날 늦게, “영암과 나주 사람들이 타작을 못하게 방해했다”고 해서 그들을 결박 지어 왔기에 그중 주모자를 가려내 처형하고, 그 나머지 4명은 각 배에 가두었다.
11월13일[12월21일] 맑음.
11월14일[12월22일] 맑음.
해남현감 유형(柳珩)이 와서 윤단중이란 자가 무법한 일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해남의 아전들이 법성포로 피란갔다가 돌아올 때 바람을 만나 배가 기울어져 전복되었는데, 윤단중은 바다 가운데서 만났어도 구조하여 건져주지는 않고 배의 물건만 빼앗아 갔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를 중군선(中軍船)에 가두고 동조했던 김인수는 경상도수영의 배에 가두었다. 내일이 아버님의 제삿날이라 나가지 않았다.
11월15일[12월23일] 맑음.
따뜻하기가 봄날과 같다. 식후에 새 집에 올라갔다. 늦게 임환과 윤영현이 와서 만났다. 오늘 밤에 송한이 서울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
11월16일[12월24일] 맑음.
아침에 조방장(배흥립)과 장흥부사(전봉) 및 진중에 있는 여러 장수들이 함께 와서 보았다. 군공마련기(軍功磨鍊記)를 살펴보니 거제현령 안위(安衛)가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그 나머지도 차례대로 벼슬을 얻었는데 내게는 은자(銀子) 20냥을 상금으로 보냈다. 명나라 장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배에 이 붉은 비단을 걸어 치하해주고 싶으나 떨어져 있어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영의정(류성룡)의 답장도 왔다.
※드디어 명량승첩의 포상이 왔다. 최고의 공을 세운 이순신은 앞서 보았듯이 숭정대부(종1품)로 가자(加資)하려다 말고 상금으로 은자 20냥만 보냈고, 다른 장수에겐 차례로 벼슬을 올려준다. 선조는 명나라 양호에게 아부하기 위해 나라 구한 공(功)은 모두 명(明)에 돌리고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는 데 불과하고 이미 벼슬이 높다” 하여 포상할 필요가 없다 했다. 오죽 죄송했으면 명나라 경리 양호가 이순신에게 붉은 비단을 배에 걸라며 최상의 군사 예우를 했을까. 이순신은 이때 명량승첩에서 드러낸 선조의 내심을 알아챘을 것이고, 자칫하다간 포상은커녕 육군으로 가서 싸우라는 명령을 어긴 일, 배설이 도망간 일 등 무슨 트집이라도 잡아 책임 추궁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을 것이다. 그가 정유년 8월 5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를 다시 쓴 이유 중에는 이 점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 같다.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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