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는 감각의 대화이다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지루한 장마철, 습한 날씨를 뚫고 탁구장에 들어선다. 환한 조명과 상쾌한 공기, 짙은 초록색 탁구대들이 마치 도심형 실내 수목원에 온 것처럼 상큼하게 나를 반겨준다. 3개월 전, 오랜만에 친구들과 탁구를 쳤다가 어릴 적 놀이본능이 깨어나 레슨을 등록했다. 어렸을 적부터 땀 흘리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축구, 야구, 씨름, 오징어 게임, 다방구, 딱지치기 등 온갖 땀 흘리는 어린이 사교생활을 많이 했었는데, 그땐 탁구가 그중 가장 귀족적인 스포츠였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면 흙먼지 마시지 않고 30분 동안 친구들과 쾌적하게 탁구를 칠 수 있었다. 굳이 약속을 하지 않아도탁구장에 모여있는 친구들과 돌아가며 치기도 하고, 복식 게임도 즐길 수 있는 어린이 살롱 같은 곳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탁구장, 3개월 동안 푹 빠졌던 탁구의 매력을 기록해 본다.
첫번째, 몰입할 수 있다. 탁구장에 들어와 라켓을 꺼내고 잠시 조용히 앉아 심호흡을 하면 여기저기서 탁구공 튕기는 소리가 각자의 시계 초침 소리처럼 똑딱똑딱 들려온다.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하게 집중을 한 에너지가 이동하는 소리들이다. 눈을 감고 탁구공 자율감각 쾌락반응(ASMR) 소리를 듣고 있으면 다른 시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40㎜의 하얗고 작은 탁구공을 맞추기 위해 스텝부터 라켓의 각도, 공의 회전까지 계산하다 보면,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렇게 1시간 동안 몰입하고 나면 쓸데없는 걱정들, 부정적인 감정들이 땀과 함께 개운하게 빠져나간다. 일종의 탁구명상을 한 것처럼 맑아진다.
두번째, 남녀노소 모두가 깔깔거리며 함께 즐길 수 있다. 탁구장에 가면 항상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탁구는 네트가 있어서 직접 부딪칠 일도 없고 다른 스포츠에 비해 부상도 적다. 실수를 해도 웃음이 나오고 복식으로 게임을 하면 웃음은 두 배가 된다.
세번째, 많이 때릴 수 있다. 야구는 한번 때리면 다시 내 차례가 올 때까지 무진장 기다려야 한다. 또 골프는 한번 때리면 무진장 걸어가야 할 수도 있고, 축구는 공에 발도 못 대볼 수도 있다. 그에 비해 탁구는 1분에도 수십번 때릴 수가 있다. 나처럼 성격 급한 사람들이 손맛을 빠르게 많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스포츠이다. 아직 초보라서 깊은 맛은 알 수 없지만 상대방과 공을 주고받으면 라켓에 짜릿한 느낌이 전달된다. 고수님들과 탁구를 치면 마구처럼 공이 휘어져와 내 라켓에 순간적으로 머물렀다 개구리 발차기하듯 밀어내고 애먼 곳으로 날아간다. 가끔씩 나의 리시브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상대방 쪽으로 넘어가면 이 맛에 탁구를 치는구나 싶다. 그리고 탁구를 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데 아무래도 귀싸대기 날리는 포즈와 비슷해서인 것 같다. 복싱을 배울 때 내 경우엔 때린 만큼 맞거나 더 맞았는데, 탁구는 아무리 공을 때려도 무섭지가 않다. 가끔 탁구공에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다. 탁구를 통해 나는 생각보다 강인한 존재임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네번째, 최고의 다이어트 운동이다. 탁구장에 자주 오시는 분들 보면 모두 날씬하다. 여러 운동을 해보니, 많은 운동이 하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걸 알았다. 복싱도 그렇고 탁구도 그렇다. 스텝으로 위치를 선정한 후 지면을 단단하게 밟고 허리로 이동하며 전달된 회전력이 어깨로 돌아가며 마지막에 손으로 임팩트를 줘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스쿼트 자세가 돼야 한다. 이 자세로 60분 동안 스텝을 밟으며 탁구를 치면 탈수기에 들어간 것처럼 땀이 탈탈 털린다. 그리고 나 같은 초보자는 공 주우러 다니는데 거의 에너지를 다 쓴다.
마지막으로, 날씨에 제약 없이 언제든지 쾌적하게 즐길 수 있다. 탁구는 요즘 같은 우중충한 장마철에 특히 빛을 발하는 사계절 스포츠이고 비교적 비용도 저렴하다.
탁구는 감각의 대화이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시간 여행으로 주인공의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로 돌아갔을 때에도 탁구를 치며 마지막 대화를 나눈다. 탁구란 감정과 감각을 주고받는 대화인 것 같다. 따뜻한 말과 감정들을 쿨하게 주고받는 운동이 탁구가 아닐까?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는 탁구를 쳐보자. 갈수록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 하루하루가 탁구공 넘어가듯이 빠르게 넘어간다. 삶에 있어 매번 의미를 찾으려 하기에 앞서 탁구처럼 재미를 찾아보자. 탁구를 칠 때처럼 어떤 감각을 느끼고 새로운 상대를 만나 배우고 경험하고 최선을 다해 몰입하고 어제보다 성장했다면 그 하루하루의 재미는 의미가 될 것이다. 꼭 누군가를 이기지 못했더라도 그 경기를 즐겼다면 우리는 승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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