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할매의 이름으로 [서울 말고]

한겨레 2024. 7. 2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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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할매시인학교, 할매 손이 평생 쥐고 있던 호미 같다. 필자 제공

권영란 | ‘지역쓰담’ 대표

원산마을 경로당 출입문 위에 한자로 반듯하게 ‘개문만복래’라고 적혀 있다. 동네 어른 중 누군가가 ‘소문만복래’를 재치있게 바꿔 붙여놓은 듯하다. 들어가면 만 가지 복이 절로 온다니, 이만큼 반기는 말이 어디 있을까 싶다. 문을 여니 할매들 10여명이 스케치북과 필통, 색연필을 놓고 기다리고 있다.

산청군 이주 6개월차, 얼마 전부터 마을 경로당 2곳에서 ‘할매시인학교’를 하고 있다. 참여자는 70대 후반에서 80대 할매들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우찌 하노. 손사래 쳤다. 살아온 얘기하고 옛날 이야기책 읽자니 할매들 표정이 다소 솔깃해졌다. 한술 더 떨었다. “울 엄니는 쌔빠지게 고생만 하다가 좀 살만하니까 65살에 덜컥 중풍이 들어, 8년 동안 누워있다가 가셨어예.” 할매들 입에서 연신 아이구나, 우짜노, 한탄이 쏟아진다. “살아있으몬 같이 했을낀데. 글자도 제우시 읽었는데.”

1939년생 어머니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학교에 가지 못했다. 딸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부모를 졸라 10살에 들어간 학교였다. 지리산 아래 산골 학교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며 문을 닫았다 전쟁이 끝나고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영영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을까. 한밤중에 쪽마루 전등 아래 쪼그려 앉아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온종일 식당일을 하며 고단했을 어머니가 책을 펴놓고 띄엄띄엄 읽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때를 기억하느냐 물었더니 어머니는 “묵꼬 사니라고 글자고 뭐고 다 잊아삐고 천치로 살았는데 너그가 무시 당할까봐…”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종종 길가 간판이나 버스 안내판을 부러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삶이 다르지 않다. 원산마을 할매들은 대부분 글자를 모른다. 한국의 기본 문맹률이 1~2%라더만 어디서 나온 통계인지 이곳 현실과는 전혀 다르다. 몇 자라도 쓸 수 있는 할매는 10명 중 2명. 읽고 쓰기가 될 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태어나고 사는 곳이 달랐을 뿐 해방과 한국전쟁을 지나온 농촌의 여성들은 내 어머니처럼 가장 변두리에서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아내야 했다.

“시가 므꼬?” 첫 시간 계동띠기 할매가 내게 물었다. “할매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두 시라예.” 그러자 “아이가, 우리는 맨날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씨부리는데”라고 말한다. 어떻게 얘기할까. 할매들 삶이 누구도 기록하지 않은 한국 근현대사이며 여성 생활사인 것을, 어떤 시인도 읊지 못한 시라는 것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라며 부추겼다. “시는 노래나 그림 같은 거다, 글자를 몰라도 된다, 하소연해도 되고 욕해도 된다, 받아적어 줄테니 따라 쓰기도 하고 그려도 보고.”

하지 지나 시작해 예닐곱 차례 하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처음에 글자 모른다고 쭈뼛대던 할매들이 이제는 자신이 일구고 있는 밭을 그리고 고단한 시절을 너도나도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그림으로 그려지고 글자로도 ‘그려진다’. 다 해놓고 맘대로 안 된다고 투정하기도 한다. 그저 고단한 삶과 속내를 풀어내는 시간이 되었으면 했는데 오히려 그리고 쓰는 것에 스스로 더 마음을 내고 있다.

아, 잊을 뻔했다. 대놓고 자랑하자면 산청에는 토박이‧이주청년들의 느슨한 모임 ‘있다’가 있다. 지난 5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공모한 ‘2024 예술로 어울림’ 사업에 선정돼 인구 3만4000명 산청군이 떠들썩했다. 30~40대 청년들이 날마다 모여 머리를 맞대는 것도 놀랍고 어린이‧어른 할 것 없이 주민이 한데 어울려보자고 지역 곳곳에서 15개의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도 놀랍다. ‘할매시인학교’는 이 중 하나이다.

이 여름 산청 할매들이 시를 쓰고 있다. 글말이 아니라 입말이다. 때로는 ‘그리는 글자’이다. 색연필을 쥐고 있는 손이 다 닳아 뭉툭해진 호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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