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했잖아, 정신 차려 이 친구야” 김수철이 돌아왔다
‘너는 어디에’ ‘아자자’ ‘그만해’ 등 담겨
지난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길가에 검은 승용차가 섰다. 창문이 스르르 내려오더니 운전석에 가수 김수철의 얼굴이 보였다. “어서 타요.” 조수석에 앉아 인사를 건네니 그는 “일단 음악부터 들어봐”라고 말했다.
카오디오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렀다. “가난해도 꿈은 내 곁에 있었지/ 힘이 들고 지쳐서 쓰러졌어도/ 다시 일어나서 너에게로 달려갔었지/ (…) 내 앞에 보이는 것은 하염없는 눈물뿐/ 너는 어디에 있는 거니/ 떠난 지 언제인데 잊었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파.”
그윽한 발라드의 제목은 ‘너는 어디에’. 오는 31일 발표하는 새 정규 앨범 ‘너는 어디에’의 동명 타이틀곡이다. 김수철이 대중음악 음반을 발표하는 건 1991년 ‘난 어디로’가 담긴 앨범 이후 33년 만이다. 이후 오랜 세월 국악과 록을 접목하는 작업에 매달려온 그가 불쑥 대중가요 신보를 낸 이유는 뭘까?
“사람들이 자꾸만 ‘왜 앨범 안 내냐?’고 묻는 거예요. 국악 작업을 계속 해왔지만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사실 10년 전 록 앨범을 내려다 그만둔 적이 있었어요. 그걸 다시 다듬고 몇년 전 만든 발라드를 더해 이번에 낸 거죠. 제 노래를 꾸준히 찾아준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는 이유도 있어요. 그분들 덕에 밥도 먹고 돈 안 되는 국악 작업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신보에는 지난 33년간 농익은 연륜과 깨달음이 담겼다. 첫 곡 ‘너는 어디에’도 그저 사랑 노래가 아니다. 순수했던 시절의 인간다움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너와 나에 대한 회한과 그때로 돌아가고픈 바람을 담은 노래다.
두번째 곡 ‘나무’도 애잔한 발라드다. “나무들은 우리들에게 모든 것을 주었고/ 또 아낌없이 다 주어도 바라는 것이 없네/ 아주 오래전부터 나무는 그렇게 살아왔어/ 침묵 속에서 이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며.” 그는 “이 앨범의 전체 메시지를 대변하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김수철은 1983년 첫 솔로 앨범에서 “못 다 핀 꽃 한송이 피우리라”(‘못 다 핀 꽃 한송이’)고 노래했다. 꽃을 피우지 못한 “앙상한 가지”는 세월이 흘러 고목이 됐다. “꽃은 아직도 못 피웠어요. 꽃을 피웠는지 못 피웠는지는 죽을 때 가서야 알겠죠. 살다 보니 꽃은 모르겠고, 거목이 보이더라고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나무, 그런 존재의 소중함을 전하고 싶었어요.”
그는 지난 21일 세상을 뜬 김민기 학전 대표 얘기를 꺼냈다. “두달 전 형을 잠깐 뵀을 때 ‘수철아, 내가 이겨낼게’ 했는데…. 형은 ‘나무’ 같은 삶을 살았어요. 조동진 형과 김민기 형은 어릴 때부터 존경하던 선배였는데, 두 형님 다 가시고…. 이젠 그런 큰형님, 큰어른 같은 분이 잘 없어요.”
어느덧 반포대교를 건너 강변북로로 접어들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이제부턴 록의 시간이었다. 헤비메탈을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기타 리프 위로 “야야야야 아자자 아자자 많이 아픈 거니/ 야야야야 아자자 아자자 어디 있니/ 야야야야 아자자 아자자 밤새 잠은 잤니” 하고 묻는다. 세번째 곡 ‘아자자’를 두고 그는 “요즘 힘들어하는 엠제트(MZ) 친구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한 노래”라고 했다.
네번째 곡 ‘그만해’에선 “아, 왜 또 싸우는 거니/ 뭐가 또 불만이야” 하더니 “내가 말했잖아 정신 차려 이 친구야/ 그만해”라고 외친다. 경쾌한 리듬 위로 화려한 기타 솔로가 춤춘다. 그는 모든 수록곡의 기타·베이스를 직접 연주했고, 드럼 소리는 컴퓨터 가상악기로 만들었다.
1989년 “정신 차려 이 친구야”(‘정신차려’) 했던 대목은 지금 이 시대에도 반복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국내외 정치판을 보면 못 싸워서 안달이에요. 예전엔 싸우다가도 대화했는데, 이젠 대화와 타협이 완전히 사라졌어요. 기후변화로 지구는 병들고 서민들은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든데, 그만들 싸우고 정신 차려야 해요.”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갔음을 노래한 로큰롤 ‘휙’이 다섯번째 곡으로 휙 흘렀다. 그 뒤로 ‘나무’의 가사에 집중하도록 더 단출하게 편곡한 버전 ‘나무사랑’과 ‘아자자’의 10분짜리 원곡 버전 ‘야야아자자’가 이어졌다. ‘야야아자자’는 클래식 대곡 구성을 차용한 프로그레시브 록 같았다. “난 이 10분짜리 원곡을 타이틀곡으로 하려고 했어요. 근데 주위에서 ‘형, 참아’ 하고 말리더라고요. 그래서 3분대로 줄인 버전을 만든 거죠.” 타이틀곡은 ‘너는 어디에’ ‘아자자’ ‘그만해’ 세 곡이다.
마지막 곡은 8분짜리 연주곡 ‘기타산조’다. 그는 기타를 가야금이나 거문고처럼 연주해 국악과 접목한 앨범 ‘기타산조’를 2002년 발표한 적이 있다. 당시 사물놀이 창시자 김덕수와 작업하고는 앨범에 싣지 않았던 곡을 이번에 넣었다. “대중가요 음반은 많이들 들을 테니 국악 연주곡을 스윽 붙였어요. 알리고 싶어서.”
그가 국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40여년 전이다. “1980년 친구들과 ‘탈’이란 제목의 독립 단편영화를 만들었어요. 영화음악을 국악으로 하고 싶었는데, 내가 모르잖아요. 교과서 찾아보니 서양음악만 있고 국악이 없어요.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1983년 첫 솔로 앨범부터 국악을 접목한 노래 ‘별리’를 실었다.
‘못 다 핀 꽃 한송이’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 ‘왜 모르시나’ 등이 잇따라 히트하면서 김수철은 1980년대 중반 최고 인기 가수로 떠올랐다. 하지만 돌연 가요계에서 사라졌다. “인기는 바람 같은 거예요. 사라지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죠. 나는 하고 싶은 음악을 할래 하고 국악 작업에 매달린 이유예요.”
그는 오랜 꿈이었던 동서양 100인조 오케스트라 공연을 지난해 10월 실현했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에요. 방탄소년단(BTS), 뉴진스 등 후배들이 대중예술 콘텐츠는 잘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 전통문화 콘텐츠를 현대화해 세계에 알려야 해요. 내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지만, 힘 닿는 한 해보려고요.” 내년부터 동서양 오케스트라 공연을 세계 무대로 가지고 나갈 계획이다.
“내가 재산이 있는 것도, 빌딩을 산 것도 아니고, 평생 음악만 했어요. 만들어놓고 발표 못한 곡이 1천곡이나 있어요. 이번 앨범도 잘 될지 안 될지 몰라요. 그래도 난 최선을 다했고, 그거면 됐어요. 앞으로도 계속 한 우물만 팔 겁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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