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 사랑'에 빠진 문승현 차관, 프랑스로 떠나보낸 통일부 [문지방]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아, 별거 아닙니다. 자기계발 차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거예요."
주 2회 과외를 받으며 '불어 사랑'에 빠진 고위직 공무원. 문승현 통일부 차관입니다. 지난달 본보 기자들과 만난 그는 관가에 파다하게 퍼진 주프랑스 대사 내정설에 격하게 손사래를 쳤습니다. 대규모 조직개편을 거친 통일부의 차관으로 있으면서 자기계발에 소홀한 것 같아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프랑스 대사 내정설'로 와전됐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한 달 뒤. 문 차관은 정말로 주프랑스대사에 임명됩니다. 대통령실은 지난 15일 통일부 신임 차관에 김수경 대통령실 대변인을 내정했죠. 그러면서 문 차관은 차기 주프랑스 대사로 낙점받아 아그레망(주재국 동의) 절차가 진행 중인 사실이 공개됐습니다. 당연히 문 차관 주변에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라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문 차관은 여전히 "내정 사실, 정말 몰랐다"며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칼부림'으로 시작한 통일부 차관직… '북한이탈주민의 날' 기념식 성과
문 차관은 당초 통일부의 '구원투수'로 투입됐습니다. "한미동맹은 인도·태평양의 '핵심축(linchpin·린치핀)'"이란 개념을 처음 이끌어낸 핵심 당국자인 문 차관은 외교부 내 대표적 '북미통'입니다. 한미 정상회담을 몇 달 앞두고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인근 사우나에서 출퇴근할 정도로 '워커홀릭'으로 유명했습니다.
통일부 업무 경험이 없는 그가 불쑥 차관에 임명된 건 이 같은 열정을 통일부에 쏟아부으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구상에 따른 것입니다. 당시 통일부는 남북관계가 악화하면서 정체성이 혼란스러웠고 잇단 조직 축소로 인해 부처 폐지론이 나올 정도로 흔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실제 문 차관은 지난해 80여 명이 넘는 인원 감축을 포함한 조직개편을 주도하면서 통일부의 업무 무게추를 '남북경협 및 협력'에서 '북한 인권 및 통일담론 형성'으로 옮겼습니다. 지난 14일 '북한이탈주민의 날' 제정 및 기념식이 정점을 찍었지요.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쉬지 않고 일을 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이처럼 동분서주하며 맹활약하던 그가 불과 1년여 만에 통일부를 떠납니다. 북한이탈주민의 날 성과를 거두자마자 조직과 작별하는 것입니다. 그를 모시던 직원들 입장에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연초부터 떠돈 프랑스대사 내정설… 불어 > 통일부?
그의 프랑스 대사 내정설은 연초부터 외교가 안팎에서 돌았습니다. 앞에서 말했듯, 그의 남다른 불어 사랑이 큰 몫을 했습니다. 문 차관은 주 2회 4시간씩 프랑스어 수업을 들었다고 합니다. 바쁜 업무가 있어도 불어 수업은 꼭 빠지지 않고 들었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전언입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 소식통은 "통일부에 대한 애착보다 불어에 대한 애착을 더 보인 게 화근"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불어에 남다른 애정을 보인 그는, 유독 통일부 얘기를 할 때면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통일부의 급격한 변화를 주도한 만큼 문 차관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업무환경 변화로 통일부 직원들은 '윗선 눈치보기'에 급급했습니다.
당연히 통일부 간부들에게 매번 훈계를 쏟아냈다고 합니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통일부 관료들이 "보신주의에 빠졌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납북자·억류자·국군포로 문제 해결을 위한 '세송이 물망초' 배지 디자인 아이디어를 낸 비서를 향해 "통일부 과장들보다 낫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이처럼 통일부에 대한 답답함을 감추지 않은 탓에 정부 청사 안팎에선 문 차관이 "통일부를 빨리 떠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실제 주프랑스 대사 내정설이 '자기계발' 해명으로 사그라들자 바로 국립외교원장 후보설이 제기됐습니다. 그만큼 문 차관이 통일부를 답답해했기 때문이라는 게 주변의 평가입니다.
'조직혁신안' 남기고 간 문승현… 통일부 직원들의 씁쓸한 추억
"평생을 남북대화와 협력 문제를 주 업무로 삼아온 조직입니다. 조직 문화가 그렇게 쉽게 바뀌나요."
한 전직 통일부 관료는 반복되는 문 차관의 '통일부 배싱(bashing·때리기)'에 대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문 차관에게는 매너리즘에 빠진 통일부 관료들이 무능해 보였겠지만, 부처 설립 이래 쭉 남북대화 기능을 수행한 조직으로서 갑작스러운 인원 감축과 부서 통폐합은 구성원들을 패배주의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질책만 쏟아내다 가장 먼저 조직을 '손절'해버렸다", "불어는 사랑했지만 통일부는 결국 지겨워한 것 아니냐"는 원망 섞인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물론 문 차관도 할 말이 많습니다. 통일부 직원들을 향해 던진 독설들이 모두 애정을 담은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통일부를 떠나면서 '부처 조직혁신을 위한 제언' 자료를 만들어 과장들에게 보냈습니다. 이와 관련해 문 차관은 "통일부를 떠나게 되면서 작성한 자료가 아니라 차관 2년차에 어떻게 조직 개선을 할 지 정리한 자료"였다며 "60여명의 과장을 일일이 만나 경청했다. 조직을 떠날 생각을 했다면 이렇게 준비했겠냐"고 반박했습니다. 실제 자료에는 통일부 차관으로서 그가 1년 동안 한 고민이 고스란히 엿보입니다. 그러나 "질책만 너무 듣고, 칭찬은 거의 없어 의욕이 쉽게 생기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죠. 격변의 시기, 통일부 직원들이 문 차관에게 바랐던 것은 이 작은 말 한마디가 아니었을까요. 프랑스에서 또 다른 포부를 펼칠 문 대사 내정자가 이번에는 질책보다는 칭찬으로 자신의 조직원들을 품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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