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스러워 더 아름다웠던 ‘김민기 선생님’의 미소
김목인 포크 싱어송라이터
‘백구’를 처음 들은 것은 아버지의 엘피(LP)에서 흘러나온 양희은의 목소리를 통해서였다. 가요에서 들어본 적 없는 긴 서사와 처연한 동요 같은 선율이 어린 마음에도 충격이었다. 특히 “팔방하는 아이들아”라는 부분이 지금도 맴돈다. 나는 사방치기는 알아도 “팔방한다”고 말하는 세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골 어느 공터나 골목길에서 쓰이던 실제 말투였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또 거기에서는 때 묻은 아이들을 다정히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커가면서 김민기의 더 많은 노래를 듣게 되었다. 음반이나 라디오로도 들었지만 사석에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로도 종종 들었다. 어른들이나 선배들이 섞인 자리에서 누군가 ‘아름다운 사람’이나 ‘작은 연못’ 같은 노래를 나직이 불렀다. 한 친구가 ‘봉우리’를 듣고 느낀 감정을 오래오래 얘기해 밤늦게까지 귀 기울이던 생각도 난다.
그 노래들은 내 세대에는 분명 오래된 노래들이다.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들이 그렇듯 시간을 벗어나 있었다. 노래를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그건 가장 도달하기 힘든 경지이기도 하다. 훗날 진지하게 곡을 쓰려고 앉으면 김민기의 노래들이 떠올랐다. 내게 김민기의 가르침은 기타 반주나 코드, 멜로디 같은 것들이 아니다. 삶이 노래에 담기는 경계에는 어떤 윤리가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얄팍한 잔재주를 부릴 때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인생의 숙연한 경험들을 노래에 담으려고 고민할 때면 자연스럽고 묵직하게 다가오곤 했다.
이제부터의 이야기에서는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선생님이라고 칭하고 싶다. 10년 전 나는 김민기 선생님을 한차례 만난 적이 있다. 학전에서 기획한 ‘무대 위의 무대’ 콘서트 때였다. 처음에는 주로 극장 직원들과 소통했기 때문에 위층 어딘가에 선생님이 계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학전에서는 내 콘서트 때 어린이 뮤지컬 ‘우리는 친구다’의 세트를 전부 치울 수 없어 미안하다며 필요하면 활용하라고 했다. 출입문과 이층침대가 있던 그 세트를 나는 음악을 파는 카페로 설정했고, 연주자들이 조금씩 연기도 하는 ‘작은 가게와 음악가’라는 음악극을 썼다. 공연에 곁들이는 유머 정도로 생각했기에 큰 부담을 갖지 않고 썼다. 설마 김민기 선생님이 직접 검토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며칠 뒤, 학전 회의실에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연출자가 내 어설픈 대본을 한장 한장 넘기고 있는데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무뚝뚝한 표정에서는 ‘봉우리’에 깔리던 낮고 다정한 목소리의 격려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저 콘서트로 인해 공연 중인 무대를 내어주게 된 깐깐한 연출자의 확인 작업이 있을 뿐이었다. 가끔 무언가가 우려되어 선생님이 눈살을 찌푸릴 때면 나는 내 공연을 취소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거장의 이미지에 주눅 든 내 편견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회의가 끝나자 선생님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한쪽 창고를 뒤졌는데, 알고 보니 카페로 설정한 내 공연에 빌려줄 소품이 없나 찾아보는 것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콘서트 전 무대도 확인할 겸 ‘우리는 친구다’를 보러 갔을 때였다. 나는 본래 목적은 잊고 즐겁게 관람했다. 다 보고 나가려는데 바로 뒤 어두운 객석에서 선생님이 앉아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노래에서 듣던 그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고. 뭘 그걸 끝까지 다 봤어?”
그건 콘서트를 앞둔 나의 부담감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한마디였다. 한창 창작을 하고 있는 현역의 거장은 여전히 작품 앞에서 멋쩍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보러 와서 고맙다는 쑥스러운 방식의 인사이기도 했다.
10년이 지난 오늘, 나는 많은 이들이 올리는 추모글과 각자가 추억하는 일화들을 보고 있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되짚는 글도 많지만 술자리에서, 택시에서, 편의점에서 잠시 마주쳤던 이들이 기억하는 인간미에 대한 글도 많다. 나도 오늘은 후배 창작자로서가 아닌, 그 따뜻한 미소에 위로받았던 한 사람으로 이 기억을 나누고 싶다.
김목인/포크 싱어송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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