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버리고 그룹 이익 택한 두산…무색해진 정부 밸류업 기조
외국계 투자자들 반발…합병비율 조정 등 대안 나오나
(시사저널=허인회 기자)
최근 두산그룹이 발표한 지배구조 개편안을 놓고 후폭풍이 거세다. 주주들의 이익을 외면했다는 지적이 들끓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 사이에선 "한국 정부와 기업은 밸류업 의지가 전혀 없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금융 당국에서도 제도 개선 검토 가능성을 내비친 가운데 두산그룹이 개편안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최근 두산그룹은 청정에너지, 스마트머신, 첨단소재 등 3대 부문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기로 했다. 이번 재편의 핵심은 두산밥캣이다. 두산 측은 두산에너빌리티로부터 두산밥캣을 인적분할한 후 두산로보틱스의 완전 자회사로 편입시킨다는 계획이다. 아울러 내년 상반기엔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을 합병하겠다고도 밝혔다. 두산 측은 공시를 통해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의 사업적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경영 효율성과 시장 경쟁력을 강화해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고자 이번에 주식의 포괄적 교환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사업적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두산의 설명과 달리 주주들 사이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조 단위 영업이익을 내는 회사와 단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한 회사의 합병이 적정한지에 대한 불만이다.
'캐시카우'를 만년 적자회사 품에 안겨
두산밥캣은 2022년과 2023년 각각 8조6219억원과 9조7589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1조716억원, 1조3899억원을 나타냈다. 특히 지난해 영업이익은 두산그룹 전체 영업이익(1조4363억원)의 97%에 달하는 등 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했다. 호실적에도 수익 대비 주가 수준을 나타내는 주가수익비율(PER)은 6배에 그쳐 투자자들 사이에선 저평가 우량주로 꼽혔다. 통상적으로 PER이 10배에 못 미치면 저평가주로 평가한다.
반면 두산밥캣 모회사가 될 두산로보틱스는 2015년 출범 이후 아직까지 흑자 전환에 성공하지 못했다. 지난해엔 매출 530억원, 영업손실 192억원을 기록하는 등 매년 적자 행진이다. 올 1분기에도 69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로봇 성장주로 각광받고 있지만 아직 시장이 열리지 않아 단기간 안에 재무 상황 개선은 쉽지 않다.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만년 적자 기업에 현금 흐름이 좋은 알짜 회사의 자산을 활용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두산밥캣의 올 1분기 말 기준 현금성 자산은 1조8000억원 수준이다.
가장 논란이 되는 대목은 합병비율이다. 두산그룹은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의 합병비율을 1대 0.63으로 정했다. 두산밥캣 1주를 두산로보틱스 0.63주로 교환해 주겠다는 의미다. 두 기업이 시가총액은 5조원대로 비슷하지만 주당 가격이 두산로보틱스가 더 높다 보니 나온 비율이다.
하지만 단순히 주가로만 합병비율을 정하는 것이 공정하냐는 것이 두산밥캣 주주들의 반발 이유다. 두산로보틱스보다 매출은 183배, 순자산(6조원)은 15배가량 많기 때문이다.
7월22일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한 테톤캐피털 파트너스의 션 브라운 이사는 "기업 가치로 합병비율을 자체 계산한 결과 적정 비율은 96대 4가 돼야 하지만 실제로는 49대 51이 됐다"면서 "한국에서 이런 날강도도 생길 수 있구나 깨달았다"고 비판했다. 테톤캐피털은 미국 소재 운용사로 1조원 이상의 자금을 전 세계에 투자하고 있다. 그는 이어 "보유한 주식이 사실상 반 정도 희석당하는 것이라 전부 매도했다"며 "한 푼도 안 낸 두산 재벌가가 수혜를 받는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외인 투자자들 동의 않으면 합병 무산될 수도"
경제개혁연대도 7월17일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밥캣 이사회가 선택한 지배권 이전 방식은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며 "일반 주주 이익보다 그룹의 이익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두산의 결정이 정부의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프로그램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사단법인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을 지낸 김규식 변호사는 "이번 합병비율을 놓고 헤지펀드 등 외국계 투자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라며 "자본시장법의 사각지대를 노린 이번 합병으로 한국 정부가 정말 밸류업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최대주주가 언제든 합병비율을 왜곡해 지분을 강탈할 수 있다는 인식을 정부가 불식시키지 않는다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요원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논란이 지속될 경우 합병비율이 조정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2022년 4월 상장사 동원산업은 비상장 지주회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를 흡수합병하기로 발표했지만 비판에 직면했다. 동원산업 이사회가 동원산업의 기업 가치를 더 낮게, 오너 일가의 지분이 많은 비상장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는 더 높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합병비율을 산정했다며 소액주주들이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동원산업과 동원엔터프라이즈의 합병비율은 1대 3.838553였다. 반발이 계속되자 동원그룹은 합병을 발표한 지 한 달여 만에 동원산업과 동원엔터프라이즈의 합병비율을 1대 2.7023475로 변경했다.
금융투자 업계에선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분 40%를 보유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 합병은 무산될 수 있다"며 "지분 7%를 가진 국민연금 역시 정부의 밸류업 기조를 의식해 부정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두산 측의 새로운 조치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논란이 확산되자 당국도 조치에 나섰다. 7월24일 금융감독원은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 합병 관련 두산로보틱스가 낸 증권신고서에 대해 정정신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주주들에게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도록 구조개편과 관련한 배경, 주주가치에 대한 결정 내용, 수익성과 재무 안정성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보완하는 차원이라는 게 금감원의 설명이다.
두산 역시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정정신고서를 제출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논란이 되고 있는 합병비율 등에 대한 조정이 포함될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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