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는 자연현상” 베를린 퀴어축제, 자부심을 채우다
“3년 전 처음 아들과 함께 (베를린 퀴어 퍼레이드에) 왔다. 올해는 라디오로 정보를 듣고 나 혼자 오게 됐다. 퍼레이드는 너무 재미있으니까! 난 모든 것에 열려있다.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행복하다.”
27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퀴어(성소수자)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포츠다머 광장으로 나온 68살 여성 가브리엘이 말했다. 은색 술로 된 가발을 쓰고, 눈꺼풀 위에 은빛 섀도를 가득 얹어 한껏 꾸민 그녀는 퍼레이드 트럭에 탄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테크노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이날 유럽에서도 최대 성소수자 축제이자 집회로 꼽히는 46번째 베를린 ‘크리스토퍼 거리의 날(Christopher Street Day·CSD)’이 열렸다. 이 축제는 1969년 뉴욕 크리스토퍼 거리에서 성소수자를 상대로 한 경찰의 반복적인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를 기리며 베를린에선 1979년 처음 시작됐다.
오전엔 비가 내리기도 했지만, 우산을 펼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수만명의 참가자들은 베를린 중앙 미테 지구의 주요 도로인 라이프치거 거리에서 시작해 연방상원을 지나 뇔렌도르프 광장까지 7.6㎞를 걸었다. 서울로 따지면 광화문, 서울역과 같은 중심부가 전면 통제돼 참가자들의 원활한 통행이 가능했다. 현재까지 정확한 참가 인원 규모는 추산되지 않았지만, 주최자인 시에스디(CSD) 위원회는 앞서 50만명 가량이 퍼레이드에 올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관광객들의 통행이 많은 포츠다머 광장에선 행진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도 거리로 나와 이들을 맞이했다. 거리엔 “편견이 아닌 자부심” “무지개(성소수자 상징)는 자연 현상입니다” “당신이 가는 모든 길을 응원합니다” 등의 메시지가 적힌 펼침막이 나부꼈다.
많은 인파를 이끈 건 각종 기업과 정당, 대사관, 비영리기구 등에서 나온 75대의 트럭들이었다. 중도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SPD)과 보수성향의 기독교민주연합(CDU)뿐 아니라 베를린교통공사(BVG) 등 공기업과 사기업 등이 모두 참여한다. 행사를 기획한 시에스디는 사전에 트럭 차량 등록을 받는데, 기업의 경우엔 사내에 성소수자를 위한 네트워크 그룹이 있거나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을 우선순위로 고려했다. 이번 퍼레이드에 참여한 메르세데스 벤츠 은행의 독일인 직원은 “메르세데스 벤츠도 트럭을 운행한다. 축제에 오고 싶어 하는 모든 직원이 참여할 수 있다. 그들의 자유다. 물론 회사는 고객들의 필요에 집중한다. 우리의 고객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신경 쓰고,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트럭을 뒤따르는 어린아이와 노인, 장애인, 게이·레즈비언 커플들은 인종과 관계없이 저마다 무지개 깃발을 펄럭이며 4∼6차선 도심 중앙을 아무런 제재 없이 걷고, 서로 포옹하고, 몸을 흔들었다. 이날 베를린 경찰은 1200명을 배치했지만, 참가자들을 향해 “행복한, 친절한 얼굴을 많이 보았다”며 전반적으로 큰 사고 없이 행사가 끝났다고 밝혔다.
올해 씨에스디가 퍼레이드를 기획하며 내세운 슬로건은 “오직 함께일 때 더 강하다 - 민주주의와 다양성을 위해”였다. 특히 독일 내에서도 극우 정당의 성장세가 커지면서, 이들의 지지자와 정책에 의해 성소수자 권리가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퍼레이드 중엔 포츠다머 광장에서 우파 그룹이 행진 대열에 들어가려는 것을 경찰이 막은 일도 있었다. 크리스텐(37)은 “게이 커뮤니티를 지지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올해 메시지는 정말 중요하다. 현재 극우가 성장하고 있고, 많은 증오, 혐오 공격에 사람들이 노출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시에스디는 독일의 헌법 격인 기본법 3조(누구도 성별, 혈통, 인종, 언어, 출신 국가 및 출신지, 신앙, 종교적 또는 정치적 견해로 인해 차별을 받거나 우대받을 수 없다. 누구도 장애를 이유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에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도 있어선 안 된다는 내용을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녹색당 소속의 리사 파우스 가족부 장관은 여기에 지지를 표하며 환영 연설을 했다고 독일 슈피겔은 보도했다.
이날 베를린에선 이 행사와 별도로 ‘국제주의자들의 퀴어 프라이드(IQP)’가 주최한 ‘팔레스타인을 위한 퀴어’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 단체는 집회에 1만5000명이 참가했을 것으로 예상했고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분리)는 자랑스럽지 않다”는 등의 펼침막이 보였다고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는 전했다.
글·사진 베를린/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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