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그때부터 수어 통역…김민기가 꿈꿨던 '배리어프리' [스프]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2024. 7. 2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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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배리어프리 공연을 보면서 김민기를 떠올렸다


배리어프리(Barrier-Free) 공연.

장애인이나 노약자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장벽을 없앤 공연을 말합니다. 휠체어 사용자들도 공연장 건물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건 기본이고,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과 자막 해설,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해설, 터치 투어(시각장애인이 공연 전에 무대 모형이나 소품, 의상 등을 만져보면서 공연을 파악할 있도록 하는 것) 등의 방식으로 장벽을 없애는 겁니다.

제가 '배리어프리' 공연을 처음 봤던 것은 2005년, 대학로 학전에서 열린 '지하철 1호선'의 수어 통역 공연이었습니다. 거의 20년 전이니, '배리어프리'라는 말도 쓰이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학전 김민기 대표는 당시 이미 54만 명이 다녀갔던 인기 공연 '지하철 1호선'의 2,700회 공연에 청각장애인 100여 명을 초청했습니다.

사실 이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저도 잘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공연도 아니고 음악이 중심이 되는 뮤지컬인데, 청각장애가 있는 관객들이 제대로 관람할 수 있을까? 그런데 공연을 보면서 제 선입견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하철 1호선' 무대 한쪽에 수어 통역사가 자리 잡고, 스크린에는 한글 자막을 띄웠습니다. '지하철 1호선'은 당시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외국어 자막 서비스를 해왔기 때문에 대사 자막을 구동시킬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습니다.

수어 통역사 고경희·김정순 씨의 공연 통역은 놀라웠습니다. 리듬을 타며 흥겹게 통역하는 걸 보고 있으니, 말 그대로 '음악이 보였습니다.' 이들은 작품을 여러 번 보면서 거의 통째로 외웠다고 했는데요, 단순히 내용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연기 같았습니다. 노래 없이 반주만 계속될 때는 악기 연주하는 몸짓까지 하면서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초청 관객 100여 명 중에는 '생전 처음 뮤지컬을 본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음악의 진동을 몸으로 느끼고, 한글 자막이나 수어 통역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수어 통역사의 몸짓으로 분위기까지 탈 수 있어서 뮤지컬을 즐기는 데 어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당시 제가 썼던 기록을 찾아보니, 김민기 대표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특별한 관객들이 와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오늘만은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공연보다는 관객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음악이 없는 뮤지컬'을 보고 계신 저 관객들을 또 제가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철학적인 의미를 지닌 사건인 것 같습니다. 배우들에게도 의미 있는 공연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학전 어린이 무대 중에는 평범한 장애인의 일상을 가감 없이 사실적으로 그려낸 '슈퍼맨처럼!'이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특별한' 장애인이 아니라, 교통사고로 1급 장애인이 되어 휠체어를 타는 초등학생 동규와 개구쟁이 여동생, 보험설계사로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는 엄마가 등장합니다. 공연은 이들 남매가 주변의 편견을 극복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과정을 통해 장애는 '차이'와 '다양성'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김민기 대표는 이 작품 관련 인터뷰에서
[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299442.html ]"세상에 장애 아닌 사람은 없다. 차이가 조금씩 있고 종류가 다를 뿐이지 모두가 장애인인데 그것이 다 같이 어울려 하나의 새 모습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공연을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며칠 전 제가 쓴 '부고기사 아닌 부고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김민기 대표의 시선은 항상 이 사회의 밝고 화려한 곳보다는 어두운 그늘, 다수자보다 소수자, 강자보다 약자를 향해 있었습니다. '배리어프리'라는 말이 없던 시절부터 장애인 관객을 위해 공연하고, 장애를 '차이'와 '다양성'으로 바라보는 공연을 올린 것은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학전의 '배리어프리' 공연 얘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지난주 토요일 국립극단의 연극 '햄릿' 공연을 보면서였습니다. 마침 그날이 '햄릿'의 배리어프리 공연 회차였거든요. 공연이 시작되자 객석에서 바라본 무대 오른편에 수어 통역사들이 나와 공연을 통역했습니다. 요즘 수어 통역 공연이 꽤 많아졌네, 생각하다가 제가 처음으로 봤던 수어 통역 공연인 '지하철 1호선' 2,700회 공연을 떠올렸던 겁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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