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살만한 곳…우리 시대의 ‘택리지’ [노원명 에세이]
오늘날 사는 동네를 정할 때 풍수(지리)를 고려한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 가능성이 높다. 인심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현대인은 어디에 살아도 홀로 살아가는 존재다. 이중환은 산수만 보고 집을 짓기보다는 반나절 거리에 산수 좋은 곳이 있어서 생각날 때 마다 가서 즐길 것을 추천했다. ‘주자(朱子)도 무이산의 산수를 좋아했으나 그곳에 살 집을 짓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반나절이면 일본도 갈 수 있다. 요컨대 지리 생리 인심 산수 네 가지 기준 중 지금도 유의미한 것은 오직 생리뿐이다.
현대인에게 생리는 땅의 소출이 아니라 ‘직업 기회’이다. 일자리가 있는 곳이 가장 살만한 곳인데 당연히 서울이 제일 살만하다. 산업화 이후 인구이동 경로를 요약하면 일자리를 찾아 너도나도 서울로 몰려든 것, 딱 한 문장이다. 수도 선망은 고려시대에도 있었고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더욱 심화되었지만 지금이 가장 심각하다. 이중환 시대에는 서울에 사는 의미가 벼슬을 하고 권력공동체에 소속되는 정도였다면 오늘날에는 그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쓸만한 일자리가 서울에 있으니 그냥 서울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도시가 과밀해지면 공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생활 비용이 올라가고 그 결과 아이를 안 낳는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주요 도시는 다 그런 과정을 겪었다. 현대 서구 사회가 보이는 저출산은 근대화, 도시화의 결과물이다. 젊은 인구는 대도시로 몰리는데 일단 대도시에 들어오면 아이를 낳지 않는다. 그 결과 대도시 인구만 유지되고 국가 전체적으로는 인구가 감소한다. 심지어 출생률이 높은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도 현대 도시에 입성하면 그 도시의 출생률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의 세계 최저 출생률은 수도권 집중이 단기간에 매우 급진적으로 이뤄진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거기에 몇몇 사회문화적 요인이 추가되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극단적 수도권 집중이다.
매일경제신문에 따르면 올해 들어 5월까지 전국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전년 같은 기간 대비 출생아 수가 가장 많이 증가한 곳은 대구시라고 한다. 같은 기간 대구의 혼인 건수 증가율도 전국 평균의 2배에 달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결혼 적령기인 30~34세 인구가 매년 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 하면 ‘축소 도시’ 이미지가 강하다. 산업도, 일자리도 없어 젊은이가 계속 빠져나가는 도시.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ABB(AI, 블록체인, 빅데이터)·반도체·로봇·UAM·헬스케어 등 미래 5대 신산업 중심으로 투자 유치가 활발해지고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젊은 인구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눈길이 가는 것은 대구 아파트 값이다. 대구는 공급 과잉 여파로 지난해 11월부터 36주 연속 하락세가 이어져 현재 84㎡ 아파트 평균 가격이 3억 4000만원 수준이라고 한다. 서울의 30% 수준이다. 대구 사람들은 울화통이 치밀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나는 여기서 저출산 문제 해법의 단초를 본다. 일자리가 있고 아파트값이 충분히 싸다면 젊은이들은 수도권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들이 지방에서 보금자리를 만들 때 더 많은 아이를 낳게 된다는 사실.
이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고 이미 유럽 등에서 검증이 끝난 얘기다. 프랑스와 독일이 우리보다 출생률이 높은 것은 그들의 수도권 집중이 우리만큼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 경쟁이 덜 치열할수록 인간은 ‘DNA 확장’이라는 본능에 충실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하다. 지방에 일자리를 분산시키는 것, 그 전제조건으로 지방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저출산 대책의 개념과 예산에 지방인프라 개선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택리지를 최근에야 읽고 후회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이제서야 보다니’하는 후회다. 이중환이 말한 4대 조건(지리 생리 인심 산수) 중에서 압도적으로 ‘생리’가 중요하다. 지금 한국의 생리는 수도권이 독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택리지는 쓸 것이 하나도 없다. 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국토균형발전은 생리가 지방에서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택할 수 있어야 더 풍요롭고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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