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흘러 극장으로…한국 관객 잇따라 찾는 미개봉 명작들
"관객들 갈수록 인증된 작품 보려 해"…예술영화 붐도 한몫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오랜 시간 해외 영화 팬들 사이에서 '명작'으로 불렸지만 국내에선 볼 수 없었던 영화들이 수십 년이 지나 최근 우리 극장에 줄줄이 걸리고 있다.
관객들이 재미나 작품성이 보장된 영화를 보려는 경향이 강해진 데다 20·30 세대 사이에서 예술영화 붐이 일면서 명작에 대한 수요가 커진 덕이다.
28일 영화계에 따르면 대만의 거장 에드워드 양 감독의 '독립시대'(1994)는 다음 달 7일부터 CGV 아트하우스에서 열리는 감독전을 통해 선공개된 후 정식 개봉한다.
모든 조건을 갖춘 재벌 집 딸 몰리와 그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절친한 친구 치치의 사랑과 오해 가득한 이틀을 그린 작품이다.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고 금마장영화제 3관왕에 오른 수작이지만 그간 우리나라에선 정식 개봉하지 않았다.
일본 영화계에 큰 영향을 끼친 소마이 신지 감독의 '태풍 클럽'(1985)은 지난달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봉해 누적 관객 수 1만4천명을 넘겼다. 작가주의 성격이 강한 1980년대 영화로는 기대 이상의 성적이다.
이 작품은 태풍이 다가오는 어느 여름 한 시골 중학생들의 이상야릇한 행적을 좇는 이야기로, 10대들의 위태로운 심리를 독특한 시선으로 관찰했다. 제1회 도쿄국제영화제 최고상인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2008년 키네마 준보가 선정한 '올타임 일본 영화 베스트' 10위에 오르는 등 평단에서 호평받은 작품이다.
CGV는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에릭 로메르 감독의 국내 미개봉작 4편을 잇달아 선보였다.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 '클레르의 무릎'(1970), '비행사의 아내'(1981),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가지 모험'(1987) 등이다.
과거 개봉했던 작품을 4K 화질로 리마스터링해 다시 내놓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1986)은 다음 달 21일 재개봉을 확정했다. 1996년 국내 첫 개봉 이후 28년 만이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희생'은 3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생애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하는 남자 알렉산더의 이야기로, 영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영화를 수입·배급하는 엣나인필름은 오는 10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마지막 황제'(1988)도 재개봉할 예정이다.
수입·배급사들이 새 영화가 아니라 이미 잘 알려진 작품을 앞다퉈 개봉하는 데에는 관객들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인증된 작품'을 보려고 하는 경향이 짙어진 것과 관련 있다.
영화 관람료가 치솟고 극장과의 심리적 거리마저 멀어진 상황에서 재미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작품을 감상하는 모험을 하기보다는, 수십년간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을 관람하려는 관객이 늘었다는 것이다.
엣나인필름 관계자는 "최근 관객들은 굉장히 신중하게 영화를 고르는 한편 검증된 작품을 선호한다"며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영화적 순간'을 기대하고 오기 마련인데, 명작에는 관객의 영혼을 건드리는 것들이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재개봉한 '쇼생크 탈출'은 약 5만 관객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6만 관객을 각각 동원하며 재개봉작으로는 이례적인 성공을 거뒀다.
최근 1년 사이 20∼30대 관객들의 예술 영화를 향한 관심이 뜨거워졌다는 점도 옛 명작을 선보이기에 좋은 토대가 됐다.
'태풍 클럽'과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10년 전 작품 '더 원더스'를 수입한 엠엔엠인터내셔널 관계자는 "옛날 영화라고 해도 시대를 뛰어넘는 힘을 가진 좋은 영화라면 관객들이 볼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요즘 나오는 재개봉작의 경우, 이전에 해당 작품을 본 적 없는 젊은 관객이 관람하는 사례가 많다"며 "이전보다 예술영화의 젊은 팬층이 두꺼워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런 작품들은 이름만으로도 예비 관객의 인지도가 높기 때문에 홍보마케팅도 수월하다.
해외 예술영화를 주로 배급하는 영화사 관계자는 "신작을 홍보할 땐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은 작품이 아니면 인지도가 낮아 배우와 감독, 스토리 등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매력 포인트를 각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잘 알려진 명작은 관객이 제목만 들어도 '아, 그 영화' 하고 알기 때문에 별다른 홍보가 필요 없다"고 말했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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