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고 나면 수다를 떨게 된다 [독서일기]

장정일 2024. 7. 2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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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문학동네 펴냄
ⓒ이지영 그림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소설이 있다. 최근에 읽은 클레어 키건의 소설 두 권이 그랬다.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지만 읽고 나서도 할 말이 없다. “문장이 정교하네요”(네네), “시적이에요”(네네).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이런 감상이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소설은 최악의 소설이다(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 독자도 소설 독자로서는 최악이다). 반면 욘 포세의 〈샤이닝〉(문학동네, 2024)은 키건의 소설처럼 빤한 이야기이지만,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정도는 벗어났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수다를 떨게 된다. 어떤 소설은 삶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논평이고, 독자는 그 논평에 답하고 싶어진다. 소설의 서두를 보자.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단지 나는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를 덮친 것은 지루함이었다. 평소 지루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내가 지루함에 압도당한 것이다. 내가 하려고 한 어떤 일들도 내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무언가를 했을 뿐이다. 나는 차에 타 운전을 했다.”

위와 같이 전개되는 이 소설의 도입부를 한 줄 요약하면, ‘주인공은 어느 날,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차를 몰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이다. 서두에 세 번이나 강조되는 주인공의 ‘지루함’은 흥미롭다. 지루함(권태)이 화제가 될 때 떠오르는 책은 라르스 Fr. H. 스벤젠의 〈지루함의 철학〉(서해문집, 2005)이다. 스벤젠은 지루함이 발견된 지는 불과 300년밖에 되지 않았다면서, 낭만주의가 이 개념을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질병과도 같은 저 개념은 “18세기 말 낭만주의가 도래하면서 자기실현에 대한 일반적 주장과 더불어 생겨났다”. 낭만주의 강령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라는 것인데, 이런 사명을 완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솟아나는 무력감이 지루함이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한권의책, 2014)에서 스벤젠의 저서는 참고할 점도 많지만 지루함을 낭만주의로 환원하는 설명은 엉성하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지루함을 느끼게 된 기원을 낭만주의가 아닌 1만 년 전부터 시작된 신석기인의 정착 생활에서 찾는다. 인간은 유목(이동) 생활을 마치고 한자리에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면서부터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농한기, 즉 한가함을 맛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 한가함에서 파생된 것이 지루함이다. 하지만 농경시대의 정착민들은 현대인처럼 한가함이나 지루함을 형벌로 느끼지는 않았다. 옛사람들에게 그것은 전체와의 통합, 예컨대 여름에는 일하고 겨울에는 쉰다는 식의 자연 질서에 통합되어 있었다. 지루함은 그런 합일이 깨어진 산업사회가 되면서 강하게 의식되기 시작했다.

25쪽 위에서 다섯째 줄에 ‘답’이 있다

지루함을 떨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기분 전환이지만, 기분 전환은 매번 지루함으로 회수된다. 현대인은 요요처럼 ‘지루함↔기분 전환’을 수시로 왕복하는데, 그런 끝에 ‘지루함=기분 전환’이 되고 만다. 지루함을 떨쳐내려는 상황에서 현대인의 관심은 오로지 ‘해야 할 무언가’를 찾는 것이지 의미를 찾는 게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시간 죽이기’이다. 주인공은 지루함을 떨치기 위해 드라이브를 택했는데, 이 선택은 다소 충동적이고 무계획적이다. 얼핏 그래 보인다.

앞선 인용에 이어지는 대목은 이렇다.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 차를 몰았다. 그러나 바큇자국이 점점 깊이 파이는 숲길로 접어들어서야 어느 순간 길바닥에 처박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계속해서 차를 몰고 있었고 급기야 차는 완전히 멈춰버렸다. 후진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어 나는 차를 세웠다. 엔진을 꺼버렸다. 나는 차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지금 여기 앉아 있다, 문득 공허감이 나를 덮쳤다.” 현대인은 자궁이 아니라 차에서 태어나고, 집 없이 차와 함께 살다가 차 속에서 죽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전개가 빠르다. 차는 구덩이에 빠졌고, 숲은 어두워지고, 눈이 내린다. 이때부터는 항해나 등산 따위를 하는 도중에 재난을 맞거나 길을 잃어버린 재난 소설이 된다. 주인공에게 놓인 선택지는 두 개다. 하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것으로, 차를 타고 달리는 도중에 얼핏 본 오두막으로 가서 구조를 청하는 것이다(문제는 너무 먼 데다 사람이 살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 다른 하나는 숲길을 따라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사람이 사는 집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없을 수도 있다)이다. 주인공은 고민 끝에 전진하기로 한다.

아무리 걸어도 인가는 보이지 않고, 눈은 푹푹 내려 쌓인다. 온몸이 추위로 사정없이 떨리고 피곤이 몰려오는 그때, 나무로 빽빽한 숲속에 빈터가 나타났다. “깊은 숲 한가운데 자리한 크고 둥그런 바위 하나, 사람들이 앉아 쉴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듯한 바위 하나, 그 바위 위로는 나뭇가지들이 마치 지붕처럼 드리워 있다. 앉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크고 둥그런 바위가.”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숲속의 빈터(Lichtung)’는 은폐된 진리가 드러나는 자리, 예술이 시작되는 자리이다. 게다가 작가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바위”는 베드로, 곧 교회나 ‘하느님의 집’을 뜻한다. 바위에 앉아 쉬게 된 주인공은 자신의 드라이브 목적을 자각한다. 25쪽 위에서 다섯째 줄에 답이 있고, 그 답을 ‘지루함’과 연관 지어 해명해야 하지만 지면이 모자란다.

휴식을 마친 주인공은 다시 앞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밝고 하얀 형체”가 그를 향해 다가온다. 주위가 환해지고 따뜻해진다.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달이 뜨고, 맨발의 부모가 그를 찾아온다(그러고 보니 그도 맨발이다!). 주인공은 차가 구덩이에 빠졌던 소설의 서두에서 이미 죽었던 것이다. 임신부의 산도(産道)가 외길이듯, 탄생과 더불어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삶도 불가역이다. 그런데 사후 세계를 보고 돌아왔다는 임사(臨死) 체험자들이 있다. 그들은 이 소설의 주인공과 똑같이 ‘환한 빛이 나를 따듯이 감싸고, 너무 행복해졌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증언한다. 20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로 수상 연설을 끝마쳤는데, 그가 이 소설에 활용하고 있는 임사 체험은 기독교적일까. 그 자신이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사후생(死後生)〉(대화문화아카데미, 1996)에 귀중한 단서들이 있다.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지면이 다해버렸군요.

장정일 (소설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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