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고 사랑했다, 밀정이 있다 해도 [역사의 뒤 페이지]

조형근 2024. 7. 2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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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은 일제마저 ‘피아 구별이 어렵다’고 기록할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밀정이 되는 일도 흔했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도 독립을 향한 꿈은 꺾이지 않았다.
1932년 1월28일 제1차 상하이사변이 벌어졌다. 중국 국민당 19로군이 일본군에 맞서고 있다. ⓒWikipedia

1933년 4월24일,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 이순탁은 학교 후원을 받아 세계 일주의 장도에 올랐다. 일본을 거쳐 5월21일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는 공동조계와 프랑스조계 등 열강의 치외법권 지역을 품은 인구 300만의 국제도시였다. 1932년에 제1차 상하이사변이 있었으니 도시 곳곳에 전쟁의 상처가 역력했다. 중국 최대의 출판사 상무인서관, 〈사고전서〉 등 장서 30만 권을 자랑하던 부속 동방도서관도 파괴됐다. 그 폐허에서 이순탁은 전쟁의 비극을 실감하며 상념에 젖었다.

상하이사변은 일본의 대중국 침략의 일환이었다. 1931년 9월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방 침략을 시작했다. 1932년 1월8일에는 도쿄에서 조선인 이봉창이 히로히토 천황(일본 왕)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조선인과 중국인은 환호했고, 일본인은 경악했다. 상하이의 한 신문이 천황이 죽지 않아 아쉽다는 취지로 보도하자 상하이 거주 일본인들이 격노했다. 일본군은 상하이에서 중국과의 충돌을 기획했다. 1월18일, 상하이 마옥산에서 일본인 승려 두 명과 신도 세 명이 중국인의 습격을 받아 승려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갈등을 고조시키다가 1월28일, 조계를 넘어 침략을 시작했다. 제1차 상하이사변이다. 일본 측 수천 명, 중국 측 1만명 이상이 죽고 다쳤다.

충돌의 시발점이 된 일본인 승려의 죽음은 일본군의 공작이었다.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 소속 무관 다나카 류키치 소좌가 관동군 특무기관의 밀명과 자금 지원을 받고 중국인 괴한들을 매수해 승려 일행을 습격하게 했다. 후일 스스로 밝힌 진상이다. 비밀 공작에 연인 가와시마 요시코도 참여했다. 이 ‘여성’은 이름이 여럿이었다. 중국식 이름은 진비후이, 동양의 진주라는 뜻의 자 ‘동진’을 옮긴 이스턴 주얼이라는 영어식 이름도 있었다. 본명은 아이신기오로 셴위(1907~1948), 만주족 출신이었다.

그녀는 청나라 황실의 친왕인 숙친왕 아이신기오로 산치의 열네 번째 딸이었다. 숙친왕은 신해혁명(1911)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청의 복벽을 추진하다 중국으로 돌아와서 죽었다. 딸 셴위를 친분이 깊은 일본인 가와시마 나니와에게 양녀로 맡겼다. 일본에서 가와시마 요시코로 자란 딸이 아버지를 이어 청의 부활을 꿈꿨다.

청나라 공주 출신인 그녀 주위에 남자가 들끓었다. 양부가 그녀를 범했다는 추측도 있다. 홀로 살아남으리라 결심한 그녀는 10대 후반부터 남장에 남자 말투를 썼다. 20세가 되던 1927년에 몽골 장군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930년에 상하이로 와서 다나카 류이치와 사랑에 빠졌다. 공작에도 몰두했다. 관동군을 돕는 군사조직 안국군을 창설하고 총사령에 올랐다. ‘동양의 마타하리’ ‘만주의 잔 다르크’ 같은 별명으로 이름을 떨쳤다.

밀정과 공작의 중심지, 상하이

그녀가 만주국의 대스타로 성장하게 될 리샹란을 알게 된 건 1937년이었다. 본명이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말에 자기와 이름이 같다며 요시코짱이라 부르고 귀여워했다. 17세의 리샹란에게 가와시마 요시코는 깊은 인상을 안겼다. 리샹란은 그녀가 “인파 속에서 눈에 띄는 오똑한 코, 희고 갸름한 얼굴에 기품 있는 미소를 띤... 농염한 남장 여자였다”라고 회고한다. 리샹란은 거침없는 그녀에게서 “자유로운 분위기와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감싸는 분위기는 자유보다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퇴폐감이었다”. 매일 밤샘 파티를 벌였고, 마약을 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리샹란은 소속사인 만영의 관계자로부터 가와시마를 조심하라는 당부를 들었다. 그녀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고,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니었다. 동시에 그 모두였다. 아무도 믿지 않았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일본이 패배했을 때도 탈출하지 않았다. 일제에 부역한 매국노인 ‘한간’ 혐의로 국민당 정부에 체포됐지만, 자신은 중국인이 아니라 만주국인이라 매국노일 수 없다며 맞섰다. 역시 한간으로 체포된 리샹란은 야마구치 요시코로 기록된 일본 호적을 제출한 덕에 한간죄를 벗고 일본으로 추방됐다. 가와시마 요시코는 일본 호적도 없었다. 1948년 3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가와시마 요시코(왼쪽)는 10대 후반부터 남장을 했으며(가운데) 안국군을 창설해 총사령(오른쪽)에 오르기도 했다. ⓒPICRYL

밀정과 공작의 중심지 상하이에서 이순탁은 상하이교통대학의 체육부 주임 신국권, 무역업체 삼덕양행과 약종상 불자약창의 대표 옥관빈을 만났다. 신국권은 중국 체육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옥관빈은 거상으로 이름 높았다. 이순탁은 옥관빈과 함께 그의 공장을 견학하며 동포의 성공을 기원했다.

이순탁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33년 8월1일, 옥관빈(1891~1933)은 프랑스조계에서 살해된다. 일제의 밀정 혐의였다. 그는 일제가 날조한 조선총독 암살 미수 사건인 105인 사건(1911)으로 실형을 받은 여섯 명 중 한 명이었다. 모진 고문을 받았고, 젊은 나이에 ‘소년지사’ 칭호를 얻었다. 4년 옥고를 치른 후 특별사면되면서 여섯 명은 일본에 협조하겠다는 자술서를 썼다. 밀정 혐의의 출발점이 됐다.

옥관빈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 기관지 〈독립신문〉의 총무 등을 맡았다. 도산 안창호의 무실역행 노선을 따르며 실업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서북 출신답게 상업에 밝았다. 중국 여성과 결혼하고 중국으로 귀화했다. 사업가로 잘 살았다. 자신을 밀정으로 의심하는 독립운동가들과 사이가 나빠졌다. 무위도식하는 독립운동가들이라며 맞서기도 했다.

<독립신문>의 총무 등을 맡은 옥관빈은 밀정으로 몰려 살해됐다. ⓒWikipedia

옥관빈을 처단한 조직은 한인 매국노를 제거한다는 취지로 ‘한인제간단’이라는 이름을 내건 남화한인청년연맹이었다. 아나키스트 정화암이 주도했고 이수봉, 김철 등이 실행을 맡았다. 그들이 밝힌 옥관빈의 죄상은 심각했다. 유림계의 독립운동가 김창숙의 체포에 정보를 제공했고, 상하이사변 때 중국군의 군정을 파악해 일본군에 건넸으며, 일본군에게 참호용 목재 등을 헌납했다(이정식 면담, 김학준 편집·해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김성숙·장건상·정화암·이강훈의 독립투쟁〉, 민음사, 1988).

옥관빈은 밀정이었을까? 불확실하다. 안창호는 부인한다. 밀정이라는 소문에 고민하며 찾아온 옥관빈에게 그의 재주가 덕을 이기는 탓이라며 자중을 권했다. 김창숙은 자신의 체포가 밀정 류세백, 박겸에 의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일본 영사관과 조선총독부 기록에 옥관빈은 ‘배일파 선인’ ‘불령선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화암은 옥관빈 처단을 백범 김구, 안공근과 의논해서 결정했다고 증언한다. 백범과 도산은 노선의 대립이 심했고, 옥관빈은 도산의 사람이었으니 그랬을 법도 하다. 하지만 다른 암살 사건은 당당히 밝히는 〈백범일지〉에 옥관빈 이야기는 없다. 게다가 백범은 윤봉길의 의거 이후 신변 위협을 피해 그 무렵 강소성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상하이에서 옥관빈 처단을 함께 결정했다는 정화암의 증언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이유다(김광재, ‘상해 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근현대사연구〉 63, 2012).

일본군 100명보다 밀정 한 명이 더 무서웠다. 밀정은 내부에서 독립운동을 파괴했다. 어제까지 동지였던 이들이 오늘 서로를 밀정으로 의심했다. 밀정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단결이 무너졌다. 결백을 입증할 도리도 없었다(이재석·이세중·강민아, 〈밀정, 우리 안의 적〉, 지식너머, 2020). “다수의 밀정이 들어와 있어서 피아의 구별 판명이 어렵다”라고 일제 스스로 기록할 정도로 밀정이 많았다. 그만큼 밀정으로 몰리는 이들도 많았다.

몽양 여운형도 밀정이라는 소문에 시달렸다. ⓒ나무위키

몽양 여운형조차 밀정 혐의를 받았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의정원 외무부 차장을 맡은 몽양을 일본 정부 척식국이 초청했다. 임시정부를 분열시키려는 의도였지만, 그는 곳곳에서 독립을 주장하고 돌아왔다. 주변에서는 여운형이 일본의 뇌물을 받았다거나 임시정부 요인 암살 임무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때도 안창호는 여운형이 애국자임을 공언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아닐까”

경성의학전문학교의 3·1운동을 주도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한위건(1896~1937)은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동아일보〉에서 정치부장으로 일했다. 제3차 조선공산당(ML당)에서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을 맡았고, 민족주의 세력과의 합작단체인 신간회 간사로도 활동했다. 1928년 초 대대적인 공산당원 검거를 피해 재차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공산당에 입당을 신청했는데 조선인 장지락(1905~1938)이 막았다. 미국 언론인이자 작가인 님 웨일스와의 대화로 나온 회고록 〈아리랑(Song of Arirang, 1941)〉의 주인공 김산이 바로 장지락이다. 1000여 명이 검거되는 와중에 탈출에 성공했다는 한위건을 장지락은 밀정으로 의심했다. 1930년에는 베이징의 당 조직에 입당을 신청했지만 마침 베이징시위원회 조직부장을 맡은 장지락이 다시 좌절시켰다.

그해 11월20일 장지락은 베이징에서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고, 이듬해 톈진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신의주로 압송되어 40여 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끝내 버텨낸 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 1930년 6월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너무 쉽게 석방됐다며 동지들이 그를 멀리했다. 그사이 다른 이의 추천으로 입당한 한위건이 의심을 이끌었다. 장지락이 항의하자 당은 사정회의를 열었다. 장지락은 한위건에게 말했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복수에 지나지 않아요. 두고 봅시다.”

베이징에서 체포된 후 톈진의 일본영사관에서 촬영된 장지락(김산)의 모습. ⓒ의열단100주년 기념사업 추친위원회 제공

장지락은 어렵사리 복당했지만 한위건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장지락이 극좌파 지도자 이립삼을 추종하며 당에 해악을 끼쳤다고 비판했다. 장지락은 지도부에서 배제되어 광산에서 노동했다. 고문으로 약해진 몸이 육체노동으로 파괴됐다. 결핵까지 걸렸다. 한위건이 여전히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놈은 사람이 아니라 독사였다.” 칼을 품고 한위건의 집을 찾아가 식탁 위에 칼을 내려놓았다. “5분 안에 둘 중 하나가 죽게 될 것이다.” 한위건은 조용히 울었다. 장지락은 칼을 남겨둔 채 방을 나왔다. 분노는 사라지고 지독한 슬픔만 남았다. 하숙집에서 며칠 동안 죽을 만큼 앓았다. 누군가 20원을 보내왔다. 그 돈으로 몇 주를 살았다. 아무래도 한위건이 보낸 돈 같았다. 다시는 죽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1934년 조아평과 결혼했다. 1936년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장지락이 부재하던 1931년 4월에 한위건은 이철부라는 가명으로 입당했다. 5월에는 조선에 남아서 병원을 경영하던 처 이덕요가 베이징으로 망명해왔다. 부부가 재결합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행복한 시간이 덧없이 짧았다. 이듬해 이덕요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33년경부터 즉각적인 총파업과 무장봉기를 내세우는 극좌 맹동주의 노선이 당에 팽배했다. 한위건은 철부 노선이라는 이름으로 극좌에 맞서다가 1934년 출당됐다. 1936년 봄, 류샤오치에 의해 하북성위원회 서기 겸 톈진시위원회 서기로 임명되며 복권됐다. 1937년 4월에 서북당대표회의와 백색구역공작회의에 참석차 옌안에 갔을 때 그곳 항일군정대학에서 홍군을 상대로 강의하던 장지락과 만났다. 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한위건은 2005년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랴오닝인민출판사

한위건은 옌안에서 41세로 삶을 마쳤다. 폐결핵과 장티푸스로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여름 동안 장지락은 옌안의 동굴에서 님 웨일스와 인터뷰를 계속했다. 9월에 옌안을 떠난 님 웨일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펄 벅 부부의 출판사에서 인터뷰를 책으로 출판했다. 이듬해 10월19일, 전선으로 이동하던 장지락은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의 지시로 처형됐다.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 간첩이라는 혐의였다. 33세, 짧은 삶이 끝났다.

1940년 4월, 중국공산당은 철부 노선의 정당성을 승인하고 한위건의 묘비를 세웠다. 2005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한위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83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장지락의 명예를 확인하고 복권시켰다. 2005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장지락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님 웨일스와의 인터뷰 후반부에서 장지락은 강경하기만 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은 것이 아닐까? ...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가 틀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신념과 오류를 지닌 채 행복하게 죽도록 내버려두어라.”

적과의 싸움에 목숨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떨었다. 사방이 캄캄한데 나아가야 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싸우고 사랑하고, 때로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넘어지고 자랐다. 그 걸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하다.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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