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국은 여기 또 나와”…한 방울도 안나온 술, 왕족부터 시민까지 어떻게 즐겼나보니 [전형민의 와인프릭]
중세에서 근대를 거쳐 현대로 넘어오는 세계사를 훑다보면 거의 모든 분쟁 상황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히기도 하고,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 분쟁, 아프리카국 여러 내전의 원흉으로 종종 거론되는 영국입니다.
제국주의 시기, 영국은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자행된 본국 편의적 행정 행위 등이 현재까지도 현지 분쟁의 원흉으로 남게 되면서, 국제민폐국(a nation of bully)으로 꼽히기도 하죠.
세계사 어디에서나 불쑥 존재감을 과시(?)하는 탓에 ‘또 영국이냐’는 말을 줄인, 또국이라는 비아냥으로 불리는데요. 와인의 세계에서도 영국의 존재감 과시는 특별합니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는 제대로 된 와인도 만들지 못했던 섬나라임에도 국제 공인 와인 교육 기관과 프로그램(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을 세워 운영하는가 하면, 와인 역사의 주요 장면마다 등장해 ‘또국’의 위엄을 여실히 과시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와인프릭은 와인 세계에서 영국의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해봅니다.
로마는 기원후 43년 영국을 정복했습니다. 그 전후로 프랑스 전역과 특히 보르도 역시 정복하면서 사실상 서유럽 전반을 손에 넣었죠. 로마는 새 속주(영국)와의 무역을 위한 전략적 항구로 보르도를 점찍었죠. 이렇게 영국과 주요 와인 산지였던 프랑스 보르도와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수백년이 지나 플랜태저넷 왕조의 초대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헨리2세가 루이 7세와 이혼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재혼 후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엘레오노르가 통치했던 아키텐 공국의 보르도 지역에 대한 통치권 역시 영국의 헨리2세에게로 이양되죠.
결국 보르도는 정치와 지리, 결혼이라는 변수로 인해 영국을 위한 가장 저렴한 와인 공급지가 됩니다. 1300년대가 되자, 보르도는 영국의 우대 관세로 생산량의 4분의 1 이상을 런던으로 수출할 정도로 영국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커집니다. 그 양이 현대의 기준으로 연간 3000만병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해 와인 양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선매매 하는 방식인데요. 네고시앙은 선매매시 가격의 컨센서스를 형성하는 주체기 때문에 보르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1300년대에는 영국 상인이 협상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얻었습니다. 게다가 스스로 네고시앙이 되어 포도원에서 직접 구매하는 영국 상인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보르도에서 생산된 와인은 영국의 왕족부터 선술집을 찾은 시민까지 소비하는 이 됩니다. 영국인이 보르도 와인을 가장 많이 마시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취향이 스타일을 결정했죠.
그러나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 사이 벌어진 백년전쟁으로 영국의 보르도 와인 수요가 일시적으로 중단됩니다. 그 기간 동안 영국은 다른 와인 공급원을 찾아야 했습니다. 백년전쟁이 일단락된 후 보르도 와인이 다시 영국에 수출되기는 했지만요.
영국은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시기, 포르투갈과 현대 FTA 조약의 시초쯤 되는 메수엔 조약(Methuen 條約)을 체결합니다. 포르투갈에서 수입되는 와인의 관세를 프랑스에서 수입되는 와인보다 낮게 매기는 게 핵심입니다.
결국 1300년대 보르도와 마찬가지로 영국 상인들의 ‘포르투 러시’가 재연됩니다. 당시 흔적은 지금도 포르투갈 포르투에 가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포르투 도시를 관통하는 도우로(Douro) 강을 따라가다보면 샌드맨, 테일러, 그래햄 등 영어식 이름을 상표로 건 와이너리를 쉽게 찾을 수 있죠.
실제로 현지 포르투갈인들에게 투어할 만한 와이너리 추천을 부탁하면, 영국 자본이 들어간 영국인 이름의 와이너리 대신 라모스 핀투(Ramos pinto) 같은 포르투갈 이름으로 된 와이너리들을 추천하곤 합니다.
1788년, 대영제국 제1함대가 이미 포도 재배를 시작한 남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식민지였던 호주로 포도나무 가지를 가져갑니다. 하지만 와인을 재배하려는 당시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변화의 바람은 1824년 버스비가 호주로 이사할 때 불기 시작합니다. 그는 호주에서 포도 재배를 가르쳤지만, 호주에서 포도 재배가 쉽지 않았던 탓에 곧 망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와 포도 재배를 연구했고, 1831년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모은 수백 그루의 포도나무들과 함께 다시 한번 호주로 향하게 되고, 마침내 노력이 빛을 보게 됩니다.
호주의 기후와 토양에 찰떡궁합인 포도 품종, 쉬라즈를 찾아낸 것이죠. 쉬라즈는 프랑스의 시라(Syrah)를 오기했다는 설과, 페르시아의 포도를 프랑스로 가져와 심었다는 가스파드 드 스테림베르그(Gaspard de Sterimberg) 기사 전설에서 착안해 이란의 고도였던 쉬라즈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설이 공존합니다.
한편 호주에서 역할을 마친 버스비는 다시 뉴질랜드로 거주지를 옮기는데요. 여기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과 프랑스인을 결합한 일련의 정치적 책략을 통해 뉴질랜드에 대한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죠.
그리고 뉴질랜드에 살면서 뉴질랜드 최초의 포도원을 개간하고 와인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습니다. 뉴질랜드 와인 역사의 첫 페이지에도 버스비의 이름이 실리게 된 겁니다.
하지만 영국에서 와인이 나지 않았던 것을 아는 분들은 고개를 갸우뚱 합니다. 와인 한 방울 나지 않으면서 왜 국제 와인 인증 과정을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죠. 그 답을 와인프릭을 통해 풀어봤습니다.
이미 한 차례 다뤘듯이, 영국은 이제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자체적으로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 시장 대비 극히 미미한 양에 불과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찌감치 수백년 전부터 전세계 어느 와인 산지보다 산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습니다만, 혹자들은 와인 종주국을 자처하는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국제적인 와인 기구 같은 것을 만들려 했다면 아마 와인 산업이 현재와 같이 잘 정비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각자 자기들의 이해득실을 따져 행동했을 것이라는 설명이죠.
어떤가요. 와인 산업과 역사에서 영국의 활동, 역시 명불허전 ‘또국’의 모습이었을까요? 아니면 변변찮은 생산지 하나 없이 오로지 와인에 대한 열정과 진심이 만들어낸 결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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