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루이뷔통·어린왕자…‘프랑스의 자부심’ 새긴 다시 없을 개막식 [고승희의 리와인드]
프랑스의 과거와 현재 잇는 무대
자유와 평등, 다양성의 가치 새겨
파리의 모든 것, 파리의 자부심 보여줘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모리스 라벨과 에릭 사티를 연결한 피아니스트 알렉산드르 캉토로프, 한 때 도난 당했던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재건 중인 노트르담 대성당, 시대를 초월해 동심을 잇는 어린왕자와 미니언즈, 파리오페라극장을 무대로 한 ‘오페라의 유령’과 이 극장에 출근하는 기욤 디옵(파리오페라발레 최초의 흑인 수석 무용수), 프렌치 캉캉과 유로 댄스, 에디프 피아프를 오마주한 희소병을 앓고 있는 셀린 디옹까지….
2024 파리올림픽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프랑스의 자부심’이자 ‘파리의 모든 것’이었다. 프랑스를 지탱해온 ‘문화와 예술의 나라’라는 오랜 역사와 ‘자유와 평등의 나라’, ‘혁명의 나라’라는 정신을 이번 개회식을 통해 아로새겼다.
100년 만에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2024 파리올림픽이 27일(한국시간) 성대한 막을 올렸다. 개회식은 스타디움을 벗어난 사상 첫 올림픽이라는 상징성을 담은 영상으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지난 19세기부터 각 세기마다 올림픽을 열어온 프랑스에선 이번 개회식 무대를 파리 전역으로 삼았다. 개회식은 프랑스의 배우 겸 예술 디렉터 토마 졸리가 감독을 맡았다.
성화를 들고 입장한 낯익은 얼굴의 성화 주자. 프랑스의 유명 개그맨 자멜은 텅 빈 주경기장에 들어서 “다들 어디 있냐”며 당혹스러워 한다. 뒤이어 등장한 자멜의 절친이자 프랑스의 국민 영웅 지네딘 지단. 영상은 지단이 성화를 이어받아 찾아가는 여정으로 시선을 옮긴다. 지단이 껑충껑충 뛰어가는 영상은 파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오마주한 영상을 엮어서 보여줬다.
영상은 프랑스가 일궈낸 모든 것을 담고 있기도 했고, 파리를 배경으로 한 콘텐츠, 프랑스와 연결 고리를 가진 콘텐츠를 소스처럼 사용했다. 지하철에 갇힌 지단의 성화를 이어받은 세 어린이가 쥐가 들끓는 파리 지하철 내부로 들어가 보트를 마주하는 순간 ‘오페라의 유령’ 메인곡 멜로디가 나온 것은 파리의 유산과 현대적 콘텐츠의 조우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프랑스 소설가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으로 뮤지컬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처음 올린 웨스트엔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파리오페라극장을 배경으로 극장의 지하에 숨어 사는 ‘음악의 신’ 유령의 이야기를 담는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프랑스 문화의 일부였지만, 지상파 방송3사 개회식 방송에서 이 곡을 언급한 사람은 MBC의 김초롱 아나운서 뿐이었다.
작품 속 유령은 아니지만, 보트를 타고 등장한 사람은 파리를 배경으로 한 게임사 유비소프트의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의 아르노 빅토르 도리안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후의 개막식은 도리안과 세 어린이가 영상과 현실을 이어 센강으로 나왔고, 성화 주자가 된 도리안이 파리 전역을 무대 삼아 성화를 옮긴다.
개막식의 시작은 센강의 오스테를리츠 다리 위에 연기로 피어오른 삼색기(프랑스 국기)가 알렸다. 흐릿한 하늘을 수놓는 거대한 지상 최대 스포츠 이벤트 다운 연출이었다.
2024 파리올림픽 개회식은 ‘올림픽 계의 혁명’이라 할 만했다. 한여름의 파리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센강을 가로지르는 선수단의 밝은 표정, 파리 곳곳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장관이었다. 강 옆에 자리한 노트르담 대성당과 파리 시청 ,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콩코르드 광장, 그랑 팔레 등 프랑스의 명소와 에펠탑 인근에 도달하는 6㎞의 선수단 행진 코스가 엄청난 볼거리였다.
개회식은 선수 입장과 공연, 어쌔신 크리드 속 인물이 성화를 들고 달리는 장면을 교차하며 정신을 쏙 빼놨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만나볼 적 없는 개회식은 창조적인 파격의 연속이었다.
올림픽은 도시 전체를 무대 삼아 총 12개의 장면으로 구성했다. 지단이 성화를 들고 뛰는 장면이 ‘축제의 시작’을 알린 첫 번째. 이후 그리스와 함께 선수단 입장이 시작되며 등장한 세계적인 팝스타 레이디 가가의 무대는 일종의 ‘환영식’이었다. 가가는 분홍색 깃털에 휩싸인 채 등장해 ‘깃털은 내 것’이라는 지지 장메르의 곡을 캬바레 공연으로 연출, 파리의 낭만 시대를 보여줬다. 그 뒤로 캉캉을 추며 파리올림픽을 찾아온 관람객과 선수단을 환영하는 현장 덕에 개회식은 축제 열기로 달아올랐다. 캉캉은 등장 초창기엔 풍기문란한 춤이었으나, 이후엔 관습을 깬 혁명의 춤으로 자리한다.
개막식이 담아낸 도시 곳곳은 프랑스의 문화 유산이자 역사의 현장이었다. 스펙타클한 구성으로 프랑스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문화 예술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이어졌다. ‘하나 된 파리’ 섹션에선 2019년 화재로 불타 무너진 노트르담 대성당을 복원하는 모습이 등장했고, ‘명품의 나라’ 프랑스의 패션 미학을 보여주듯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의 장인들이 메달 케이스를 만드는 장면도 나왔다. 파리 거리와 건물 옥상에선 프랑스를 상징하는 사람들이 등장해 춤을 추고 공연을 이어갔다. 파리오페라발레 최초의 흑인 에투알로, 지난해 한국 공연에서 역사적인 수석 승급 무대를 가진 기욤 디옵이 파리 시청 옥상에서 춤을 췄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인종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지금의 프랑스를 이끈 ‘혁명 정신’도 개회식에 담겼다.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쓴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주요 넘버인 ‘민중의 노래’가 울리며 극장의 모습을 비췄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투옥된 바스티유 감옥에서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불리던 ‘아, 잘 될거야’라는 헤비메탈 밴드 고지라가 부르기도 했다.
이번 올림픽에선 특히나 평등과 다양성에 무게를 뒀다. 이에 음악, 춤, 공연 예술에 전반에 있어 장르와 인종을 초월한 무대를 꾸몄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야외 무대에선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알렉상드르 캉토로프는 인상주의 시대의 프랑스 출신 작곡가 라벨의 ‘물의 유희’와 에릭 사티의 ‘짐 노페디’를 들려줬고, 성악가 악셀 생 시렐은 그랑팔레 지붕 위에서 프랑스 국가를 불렀다. 프랑스 학술원에서 군악대와 아야 나카무라가 어우러진 공연 역시 다양성과 평등의 상징이었다. 세대, 성별을 뛰어넘는 댄서들의 유로댄스를 보여준 것도 이러한 의미를 담기 위해서다. 다만 이 다양성 안에 아시아인은 그리 보이지 않았다.
개회식에선 ‘패션의 나라’ 프랑스의 진면목도 볼 수 있었다. 드비이 육교 위에선 프랑스의 미래를 책임질 신진 디자이너들의 패션쇼를 보여줬다. 이번 올림픽 개회식에서 레이디 가가와 생 시렐의 의상을 명품 브랜드인 디올과 루이뷔통이 제작한 것과 교차되는 지점이다.
상상과 영화 섹션에선 프랑스가 만든 영화 기술과 열기구 등 ‘최초의 시도’들도 풀어냈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세계 최초의 영화 ‘기차의 도착’을 기차역을 모티프로 한 오르세 미술관에서 보여줬고, 이를 현대 애니메이션 ‘미니언즈’와 교차하다 어린왕자의 비상을 만나기도 했다.
개회식은 말미로 향할수록 더 뜨거워졌다. 미니멀리즘으로 꼽히는 프렌치 시크 대신 화려하고 장엄했다. 프랑스인의 자긍심이 느껴지는 연출이었다. 최후의 성화 주자는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스페인)이었다. 그는 프랑스오픈이 열리는 롤랑가로스에서 14번이나 우승해 ‘파리의 남자’라는 별칭을 안고 있다.
감동의 대미는 셀린 디옹의 차지였다. 그는 성화 점화 이후 ‘프랑스 발명품’ 열기구가 상공으로 떠오를 때, 20세기 프랑스 최고 가수인 에디트 피아프의 ‘사랑의 찬가’를 에펠탑에서 불렀다. 2022년 12월 희소 질환인 ‘전신 근육 강직인간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공개한 뒤 사실상 은퇴한 이후 무려 1년 7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고정관념을 깨버린 상상 이상의 개막식은 프랑스 문화와 역사에 얽힌 이야기와 그것에 대한 레퍼런스로 가득 찼다. 프랑스의 문화가 지난 수백년 프랑스를 넘어 여러 나라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프랑스의 유구한 역사에 비해 이를 잇는 현재의 대중문화는 다소 빈약하다는 점을 보여준 자리이기도 하다. 꽤 오랜 시간 보여준 ‘오늘의 파리’로 1970년대 유로댄스와 패션쇼를 엮었다. 모든 역사의 순간에 프랑스가 남긴 예술을 전 세계인이 알고 있는 현재의 대중음악과는 거리가 있었다.
화려한 개막식에선 끔찍한 ‘사고’가 나왔다. 우상혁(육상), 김서영(수영)을 기수로 내세운 한국 선수단이 배를 타고 들어올 때 장내 아나운서는 불어로 한국을 ‘Republique populaire democratique de coree’로, 영어로는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라고 반복했다. 둘 다 북한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장미란 제2차관은 프랑스 파리 현지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토마스 바흐 위원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며 “아울러 정부 차원에서 프랑스에 강력한 항의 의견을 전달할 것을 외교부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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