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부양자가 되어줄래?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4. 7. 2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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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견문발검]

[미디어오늘 이송희일 영화감독]

▲ 사진=gettyimagesbank

얼마 전 어느 학술모임에서 우스개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 동성혼을 이룰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 관료들의 의식이 바뀌는 거고, 다른 하나는 한국이 G7에 가입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더 빠를까요?”

G7 국가 중 일본만이 유일하게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전방위 압력이 가해지는 형국이다. 2023년 5월 G7 회담을 앞두고 미국은 물론 캐나다, 프랑스, 독일, EU 대사 들이 기시다 총리에게 '성소수자 인권 보호 조치'를 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일본 경제단체들도 국제적 위상을 위해 동성혼 합법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정치계를 채근했다. 그러자 기시다 총리는 성소수자 관련 정부 직책을 신설하고 성소수자 단체와의 면담을 자청했다. G7 국가에 걸맞는 격을 갖추라는 성화에 마지못해 꼬리를 내린 셈이다.

그 뒤를 이어 2024년 초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 동성혼 찬성 의견이 72%까지 치솟았다. 또 동성혼 불인정이 '위헌'이라는 지방법원의 판결이 나오는 등 일본에도 동성혼 합법화가 임박했다는 신호들이 지금까지 바쁘게 발신되는 와중이다.

정치 관료들이 바뀌는 게 빠르겠는가, 한국이 G7에 가입하는 게 더 빠르겠는가. 이 우스개 질문에 학술모임 멤버들이 웃픈 표정을 지으며 모두 후자를 지목한 데는 이런 사정이 반영돼 있다. 파트너십 보장으로 성소수자의 기본권을 인정하는 일본조차 저 지경인데, 그 흔한 차별금지법 하나 제정하지 못할 정도로 숨 막히는 보수 한국에서 어떤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려면 G7 가입이 훨씬 더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G7 가입으로 웅장한 '국뽕'의 힘에 도취되고 싶은데 막상 그에 상응하는 격을 갖추기 위해 성소수자 권리를 인정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우스개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K-인권'이 처한 후진적 곤경을 드러내는 단면일 것이다. 대만, 네팔에 이어 태국도 동성혼 합법화의 대열에 올라섰고 이제 그 뒤를 일본과 베트남이 따라갈 것이다. 현재 동성혼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국가가 무려 37개국. 그저 한국만 뒤쳐지다 못해 어딘지 모를 인권의 사각지대에 유폐돼 있을 뿐이다.

1994년 한국 성소수자 인권운동이 시작된 이래 정확히 30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동성혼은커녕 가족구성권과 차별금지법도 여전히 안갯속이다. 여야 모두 보수 기독교와 극우 세력에 발목이 잡혀 성소수자의 기본권을 철저히 부정해왔다. 보수 정당이야 그렇다 쳐도 스스로 민주화의 적자라 자부하는 민주당조차 지난 세월 지겹도록 '나중에'를 반복해오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렇게 절벽이니, '나 죽기 전에 한국에서 동성혼 합법이 되는 걸 볼 수 있을까?' 라는 객적은 농담을 푸념처럼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난주, 깜짝 놀랄 소식이 들려왔다. 대법원이 동성부부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것이다. 성소수자의 사회보장 권리를 인정한 최초의 사례. 한국에서 이걸 보다니, 확실히 기념비적인 판결이었다. 세계사적 추세, 밝은 눈의 진보적인 법관, 그리고 지난 세월 부단히 벽을 두드려온 성소수자 운동이 합작해 만든 역사적 틈새였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강고한 성벽이 흔들리고 마침내 금이 간 것이다.

문뜩 잘하면 나 죽기 전에 동성혼 합법화를 볼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왕에 벌어진 성벽의 틈새를 향해 성소수자들이 쉴 새 없이 주먹을 두드릴 것이기 때문이다. 향후 각종 소송과 법리 다툼이 벌어지고 다양한 시민권적 요구가 쇄도할 것이다. 대부분의 동성혼 합법화는 이렇게 한번 열린 틈새를 놓치지 않은 기민한 두드림의 결과였다.

대법원 판결 직후, 한국의 SNS에는 성소수자들의 기쁨과 눈물의 언어가 흘러넘쳤다. 그야말로 말너울의 성찬이었다. 이제 프로포즈를 할 때 '나의 피부양자가 되어줄래?'로 하겠다는 치기어린 다짐이 끊임없이 물결쳤다.

▲ 7월18일 동성 연인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과 관련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보험료 부과 처분 취소 소송에서 승소한 소성욱씨와 김용민씨(오른쪽)가 손을 잡고 밝은 표정으로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이성애자 부부에게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그 피부양자의 권리를 30년 만에 얻게 된 성소수자들이 드디어 자신도 이용할 수 있게 됐다며 으스댔다. 누군가에는 무의미할 수도 있는 그 피부자양라는 말이 기본권을 부정당한 성소수자들에게는 그토록 묵중하고 가슴 시린 언어였던 것이다.

시민권의 조각 하나로도 그렇게들 기뻐하는 걸 보며 코끝이 찡해졌다. 자신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이토록 펄쩍 뛸 만큼 흥분되는 일이다. 이 당연한 권리를 체계적으로 박탈하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차별해왔던 저 지독한 혐오의 장벽이 허물어질 날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래, 끝내 사랑이 이기는 날이 올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반드시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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