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년 전 국회에도 '막말', '페미 논쟁' 있었다?
정치의 현장 국회는 언제나 경원의 대상이었지만, 22대 국회 개원 후의 풍경은 도를 넘은 것 같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임기 개시 두 달이 되도록 개원식도 열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청원심사를 빌미로 초유의 '대통령 탄핵청원 청문회'가 열리고, 상임위원장이 근거도 없이 증인에게 학원 강사처럼 '5분간 퇴장'을 명령하며, 본회의장에서는 의원이 의장석에 경의표시도 하지 않고 퇴장하고, 본회의가 합의도 없이 30분 가까이 그저 멈춰서 있기도 했다.
다수 야당은 숫자만 믿고 법안 통과를 밀어붙이고, 여당은 집권세력으로서의 책임감이나 도량은 아랑곳없이 반대만 하더니 심지어 국회의장의 중재안마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정치적 양극화', '민주주의 후퇴'라는 최근의 전 세계적 조류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모습인 동시에, 전문가와 시민사회가 입만 열면 정치개혁을 부르짖는 이유다.
정치개혁 주장은 대부분 헌법개정을 목표·정점으로 제기하거나 최소한 개헌을 포괄하고 있다. 최근에만 해도, 우원식 국회의장이 76주년 제헌절을 맞아 개헌을 제안했고,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경선에서도 김두관 후보가 개헌 주장을 들고 나왔다. 앞서 문재인 정부도 2018년 개헌을 추진했다. 헌법이 본질적으로 정치적 기본질서와 인권 등 기본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헌은 1987년 이후 한 차례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열대 바다의 열에너지가 태풍을 탄생시키듯, 37년 전 개헌을 성사시킨 에너지를 공급한 것은 87년 6월항쟁이었다. 그러나 2016년 박근혜 정부를 탄핵시킨 촛불의 에너지는 결과적으로 개헌이라는 결과물을 낳는 데 실패했다.
있는 헌법을 고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무에서 유를 창조한 '제헌'의 순간은 어땠을까. 아무리 광복이라는 막대한 열원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았다 한들,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신간 <헌법의 순간> (박혁 지음, 페이퍼로드 펴냄)은 '대한민국 헌법'을 처음 만든 1948년 여름의 20일을 추적한 책이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총회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결정했고 이에따라 같은해 5월 10일 총선거가 치러져 198인의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나(인도·러시아 등 땅이 광활하고 인구가 많은 국가에서는 지금도 종종 그렇다) "열악한 사정으로 결과가 일찍 발표되지 못하고 이틀이 지나고서야 언론에서 당선자를 발표"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5월 12일 당선이 결정된 제헌의원들은 5월 31일 서울 중앙청광장(지금의 광화문광장 일원)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팔도에서 모여들었다. 제헌국회 의장 이승만의 "대한민국 30년 5월 31일"로 끝나는 유명한 개원 연설이 있은 후, 개원식 다음날인 6월 1일부터 헌법기초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해 이후 3주간 17번의 회의를 거쳐 초안을 완성한다.
이후 6월 22일부터 7월 12일까지의 20일간은 헌법기초위가 제출한 초안을 놓고 제헌의회 198명 전원이 참석해 심의를 진행한다. 책에서 다루는 것은 이 20일 간의 논의 과정이다.
이야기의 뼈대는 헌법의 순간을 고스란히 담은 당시 회의록입니다. 제헌국회 회의록은 헌법심사 과정의 생생한 육성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중략) 꼼꼼한 속기사는 회의록에 이런저런 풍경을 모두 담아둡니다. 덕분에 헌법의 순간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장내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앉아서 추임새 넣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어찌나 선명한지, 숨소리가 들리고 표정까지 보입니다. (책 21쪽)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물을 보유한 '기록의 민족' 조선의 DNA는 일제 강점기 36년을 지나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고 살아있었던 셈이다.
마침 책이 다루는 첫 주제는 '조선'이냐 '대한'이냐, 즉 국호의 문제였다. 이는 제헌국회에서 이뤄진 첫 서면질의와 그에 따른 토론이었다. 제헌헌법이나 현행헌법이나, 헌법 본문(조항)에는 국호에 대한 규정이 없다. 다만 국호는 '대한민국 헌법'이라는 제목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이라는 전문(前文)에 등장한다.
국호를 정할 때 이뤄진 토론과 관련해서는 "'대한'이란(이름은) 문자 그대로 '배 안의 ×신'(배냇××)"이라는 대한민국(당시엔 국호를 정하기 전이었으나) 헌정사 최초의 '막말'에 벌집이 된 회의장과, 이를 규탄하는 후속 발언이 쏟아진 풍경에 대한 묘사도 나온다. 정치 뉴스를 챙겨 보는 독자에게는 익숙한 모습이겠지만, '76년 전 국회도 이랬구나'라는 묘한 감상도 느껴진다.
국호에 대한 토론 후 이뤄진 표결에서 '대한'이 압도적 다수를 점한 것이나, 헌법상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으로 할 것인지 '인민'으로 할 것인지 정하는 토론에서 합리적 반대안에도 불구하고 '국민'으로 결론이 나버린 것은 당시 남북한·좌우익 간의 대립 상황과 무관치 않다.
심지어 헌법 공포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1950년 1월 발표된 '국무원 고시 7호'는 "북한 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짓기 위하여 '조선'은 사용하지 못한다. 조선은 지명으로도 사용하지 못하고 조선해협, 동조선만, 서조선만 등은 각각 대한해협, 동한만, 서한만 등으로 고쳐 부른다"고 정했다고 책은 설명한다. '조선간장'이 살아남은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또 하나의 생존 사례는 모 신문사의 제호로, 한국전쟁 중 김활란 공보처장이 "조선일보의 '조선'이란 제호는 북이 쓰는 국호이니 바꿔야 한다"고 국무회의에서 제안했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조선일보는 일제 때부터 사용하던 고유명사인데 조선이면 어떻고 한국이면 어떠냐'고 해 살아남았다고 전해진다.
인민-국민 논쟁에서는, 권리의 주체를 국민 대신 인민으로 통일하자는 수정안은 재석 167인에 반대 87인으로 아슬아슬하게 부결된다. 김준연 제헌의원이 '선거권 등의 주체는 국민으로, 신체의 자유 등 보편적 인권의 주체는 인민으로 하자'는 취지의 수정 제안을 내놓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두 '국민'으로 하자는 원안이 찬성 89인으로 가까스로 통과된다.
유진오 전문위원은 "좋은 단어 하나를 공산주의자에게 뺏긴 셈"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비슷한 이유로 헌법전문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직접적 동기로 언급된 '기미 삼일운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삼일혁명'으로 더 자주 불렸음에도 결국 '혁명'이 아닌 '운동'이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권리의 주체를 '국민'으로 정하는 문제에 이어 책은 헌법 제정 과정의 주요 토론 주제들을 일별한다. 물론 전체 9장 98조, 부칙 포함 103조에 이르는 모든 조문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는다. 국호와 국민규정에 이어 책이 다루는 주제는 △영토 조항 △남녀동권 조항 △의무교육 조항 △반민족행위처벌법 근거를 둔 부칙 101조 규정 △신체의 자유 조항과 '고문받지 않을 권리'가 제헌헌법에서 빠진 사연 △정교분리 조항 △이익균점권 조항 △단원제-양원제 논쟁 △대통령제-내각제 논쟁 등이다.
단원제냐 양원제냐,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하는 정치체제 논쟁은 1948년 당시나 2024년 현재나 내용적으로 특별히 다를 게 없다는 점이 오히려 흥미롭다. 신체의 자유 조항과 관련해서는 일제의 모진 핍박을 겪은 한국민들의 염원에도 '치안이 우선'이란 이유로 제헌헌법에서 빠지게 된 안타까운 과정이 묘사돼 있다.
여러 논의 가운데, 현재적 의미와 관련해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것은 제헌헌법에 담긴 남녀동권 규정과 노동자 이익균점권 조항이다. 이 두 조항은 헌법기초위원회가 제헌의회 본회의에 보고한 초안에는 없던 내용이 추가된 것이다.
198인의 제헌의원은 전원 남성이었다. 그리고 헌법기초위가 제안한 초안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다'는 포괄적 평등권 조항은 있었지만 성평등 관련 내용을 담은 조항은 아예 없었다. 1948년 5.10 총선에서 '축첩 정치인 낙선운동'을 여성단체가 전개할 정도로 축첩 문제는 당시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음에도 말이다.
결국 권태희 제헌의원이 '국가 존립의 기초로 할 수 있는 가정, 결혼, 여성 문제를 다루지 않은 점이 헌법안의 중대한 결함'이라고 지적한다. 바이마르공화국 헌법과 폴란드 헌법 등을 사례로 들기도 했다. 나중에 4.19 이후 내각 총리로 2공화국 정부를 이끈 장면 의원도 '헌법안은 남녀동등권을 말하고 있지만 허울뿐'이라며 '봉건적 차별이 여전한 현실을 직시하자'는 취지의 주장을 한다. 이들의 육성을 들어보자.
장면 의원 : 우리가 진실로 해방과 남녀동등을 부르짖고 모든 것을 평등한 입장에서 민주주의적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때, 새로운 헌법이 여성에 대해서는 하등에 이렇다 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없습니다. 여자가 한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모든 사회적 폐단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반드시 헌법이 한 가정 속 여성 지위를 보장해야 합니다. 결혼문제에서 배우자 선택은 여성의 동의로서만 비로소 성립돼야 할 것입니다. 재산권 상속권 기타 가족제도에서도 부부동등의 입장에 입각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표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벌써 다른 나라 헌법에도 명백히 표시돼 있는 것이올시다. (제헌국회 회의록 1회 21호)
권태희 의원 : 이 (헌법제정안) 초안이야말로 바람이 없는 타이어와 마찬가지요, 마개 빠진 사이다와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국민의 반이 여자입니다. 국민이라는 단어가 서른 한 번 언급되는 이 헌법에서 1500만이나 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 여자 문제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건 이 헌법의 기초적인 착오라 생각합니다.(...)가장 중대한 민족적 요건인 결혼문제와 가정문제가 헌법에 한 마디 한 조목도 없으니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실망을 느끼는 바이올시다. (제헌국회 회의록 1회 20호)
나아가 의원 198인 중 여성이 하나도 없다는 자성도 나온다.
조헌영 의원 : 남존여비 사상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국회 대의원 200명 중에 여자 대의원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역시 남존여비 사상의 결과라 하겠습니다. (제헌국회 회의록 1회 25호)
궁금하다. '이미 성차별은 해소됐고, 구조적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남성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재의 반(反)페미니스트 정치인 또는 형식적 평등론자들이라면 1948년 당시에 어떤 입장에 섰을까?
'성별에 따라 차별받지 않는다'는 포괄적 평등권 조항을 넣었으니 된 게 아니냐', '국민이라는 주체에 남녀가 모두 포함되는데 여성 문제를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지 않을까? 조헌영 의원의 일침에도 '여성도 남성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할 피선거권이 보장됐고 실제 여성의 출마도 이뤄졌는데 유권자들이 남성 후보에게 투표한 결과이니 뭐가 문제냐'고 하지 않을까?
제헌국회 의원들은 결론적으로는 권태희·장면·조헌영 의원의 손을 들어줬다. 제헌헌법 20조에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 혼인의 순결과 가족의 건강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조항이 들어간 것이다.
'이미 평등한데 여성할당제가 뭐가 필요하냐', '85년생 여성이 변호사가 되는에 어떤 차별이 있느냐'며 구조적 성차별을 부인하는 정치세력은 2024년 현재의 기준으로는 물론 76년 전 제헌국회의 기준으로도 시대에 동떨어진 셈이다.
제헌헌법 20조에서 규정한 '혼인의 순결'은 참고로 중혼 또는 축첩제를 반대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 조항은 1962년 박정희 정부 당시 이뤄진 개헌에서 '남녀동권'이란 표현이 삭제되고 "모든 국민은 혼인의 순결과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흘 받는다"고 바뀐다. 불과 14년 사이에 '남녀동권'이 삭제된 것이 "그간 남녀평등이 달성돼 세상이 많이 변하기라도 한 것"(책 저자의 비꼼)일 리는 없고, 이 역시 헌정사에 남겨진 후퇴의 기록이라 할 것이다.
제헌헌법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대목은 18조 후단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는 조항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만들어진 현행 헌법에도 없는 노동자 이익균점권이 제헌헌법에는 있었던 것이다!
제정 당시부터 이승만 의장과 제헌의회 내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던 이 조항은 결국 사문화된다. 저자는 "노동자 이익균점권을 실현한 법률은 끝내 만들어지지 않는다. 헌법 밖으로 나와보지도 못한 것이다. 결국 (박정희 정부 때) 1962년 개헌 과정에서 아예 없애버린다"며 이승만 의장이 제헌국회 논의 당시부터 '어차피 안 될 것'이라는 태도를 취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승만 의장 : 이익분배권이라든지 균점권을 가진다는 것이 과히 큰 문제가 아닌 줄 알아요. 왜 그러냐? 지금 조건에서 이익을 균점한다는 것이 그렇게 잘될 것이 아니에요. 국회에서 통과되었다고 하더라도 시행하자면 잘 안 되는 것이에요. (제헌국회 회의록 1회 27호)
물론 사회주의 세력과 직접 경쟁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 일제의 적산이 당시 남한 국부의 80%를 차지했던 상황에서 '적산은 민족의 공동재산이니 이를 운영해 얻은 이익은 불하받은 자본가뿐 아니라 노동자도 분배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점 등이 이 조항 입법의 배경이 됐기는 하나, 기업의 이윤에 대해 노동자가 임금 외에도 일정 몫을 분배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헌법 조문으로 못박았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곽재훈 기자(nowhere@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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